연세 140년의 시간, 한 자리에서 만나다
연세대학교 140주년 특별전 《연세보감 – 연세 보물을 비추다》
연세대학교가 개교 140주년을 맞아, 교정 곳곳에 흩어져 있던 보물들을 한 전시장 안으로 모았다. 연세대 학술문화처 박물관과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이 공동으로 연 특별전 《연세보감(延世寶鑑) – 연세 보물을 비추다》가 5월 9일부터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박물관 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전시는 국보·보물을 포함한 국가 지정문화유산과 근현대 자료, 동문들의 성취를 아우르며, ‘연세 140년’을 문화유산으로 읽어내는 자리다.
소장품 연표
‘보감(寶鑑)’으로 다시 보는 대학의 얼굴전시 제목 ‘연세보감’은 연세대가 소장한 문화유산을 ‘과거와 미래를 비추는 지혜의 거울’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곧 대학을 둘러싼 수많은 유물과 기록들을 단순한 소장품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작동해 온 기억의 매개이자 지성의 축적물로 읽어내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전시는 연세라는 이름과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역사를 다섯 개의 키워드로 풀어낸다. △연(延) △세(世) △광(廣) △혜(惠) △희(禧)가 그것이다. 각각 ‘역사를 잇다’, ‘세상을 밝히다’, ‘터전과 학문을 넓히다’, ‘은혜를 베풀다’, ‘경사스러운 기쁨을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관람객은 이 다섯 개의 방을 거치며 연세의 140년을 시간 순서이자 가치의 층위로 따라가게 된다.
연(延): 삼국유사에서 월인석보까지, ‘역사를 잇는’ 보물들첫 번째 섹션 ‘연(延): 역사를 잇고 이끌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긴 호흡을 보여주는 문헌과 유물이 소개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려 시대를 총체적으로 기록한 『고려사』, 통일신라 불교 문화의 일단을 보여주는 『봉업사지 청동북』, 한글과 한자를 함께 새긴 불교 언해 간행물 『월인석보』 등이다. 이 유물들은 일제 강점기 국외 유출과 훼손의 위기를 거쳐 연세의 품에서 지켜진 사례로, 대학이 한국 문화유산 보존에 기여해 온 한 단면을 보여준다.
혜(惠): 제중원에서 시작된 의료와 교육의 ‘은혜’‘혜(惠): 은혜를 베풀다’는 1885년 제중원에서 출발한 연세의 기원을 다룬다.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이 남긴 의료·교육 기록들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제중원의 운영을 보고한 『제중원 제1차년도 보고서』, 알렌이 남긴 진단서와 에비슨의 수술 장면을 담은 유리건판, 언더우드의 서명 검 등은 서양 의학과 근대 교육이 이 땅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료들이다. 관람객은 이 방에서 “연세의 시작은 단지 한 학교의 설립이 아니라, ‘혜(惠)’의 정신이 의료와 교육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된 과정”임을 확인하게 된다.
흉판 제작 기념 사진
광(廣): 캠퍼스와 학문의 확장, 그리고 ‘연세 101’세 번째 섹션 ‘광(廣): 터전과 학문을 확장하다’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연세대학교로 통합·발전해 가는 과정을 공간과 기술의 변화를 중심으로 조명한다. 연희전문학교 종합계획도와 스팀슨관·언더우드관 관련 자료는 신촌 캠퍼스가 어떻게 근대적 교육 공간으로 자리 잡았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눈길을 끄는 유물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다. 1961년 연세대학교 한만춘 교수가 제작한 이 아날로그 컴퓨터는 진공관식 전자장치를 활용해 고등 미적분 계산을 실시간 처리할 수 있었던 장비로, 디지털 컴퓨터 도입 이전 한국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기계다. 오늘날에는 다소 투박하게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연세가 가진 과학기술의 얼굴”이자, 한국 전자공학과 계산기술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상징적 유산으로 평가된다.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 1961년 국가등록문화유산
함만춘 교수가 1961년 제작한 한국 최초 아날로그 컴퓨터
세(世): 윤동주 친필에서 민주화 기록까지, ‘세상을 밝힌’ 발자취‘세(世): 세상을 밝히다’에서는 연세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보여준 사회적 실천과 참여가 전면에 놓인다. 전시실 한편에 자리한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는 많은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무는 유물 가운데 하나다. 빽빽한 필체로 적힌 시 구절들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을 거쳐 간 청년 지성들의 고민과 시대 의식을 압축해 보여준다.
이 밖에도 『독립신문』, 대한국독립협회 관련 문서, 4·19혁명 참여자 조사서 등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록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료들은 연세가 근대화·자주독립·민주주의라는 한국 사회의 세 가지 큰 과제를 어떻게 마주했는지를 구체적인 사료로 보여주며, ‘대학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화두를 오늘의 관람객에게 다시 던진다.
희(禧): 세계와 나누는 기쁨, 연세인의 문화예술 성취마지막 섹션 ‘희(禧): 경사스러운 기쁨을 전하다’는 연세 출신 인물들이 국내외 문화예술계에서 남긴 발자취를 조명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국어국문학 89)의 작품과, 아카데미 수상작의 시나리오를 쓴 봉준호 감독(사회학 88)의 관련 출판물·자료 등이 전시되어, 한 대학의 교육이 세계적 문화 성취로 이어진 과정을 상기시킨다.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운동에서부터 오늘날의 글로벌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연세인’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된 성취의 순간들이, 이 방에서 “희(禧)”의 서사로 엮인다.
대학 박물관이 제안하는 ‘공유된 아카이브’《연세보감》은 단순히 소장품을 나열하는 전시가 아니다. 국보·보물급 문화재에서부터 의료·과학기술 자료, 동문들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유산을 한 자리에서 조망함으로써, 대학 박물관이 지닌 아카이브적 기능을 전면에 드러낸다. 전시 동선은 ‘연–세–광–혜–희’라는 주제어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연세의 역사”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걷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관람객에게는 “연세의 보물”이 곧 “사회와 공유되는 공적 유산”이라는 메시지를 환기하는 셈이다.
연세대학교는 이번 전시에 대해 “연세가 간직해 온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140년의 역사 속에 축적된 지성과 정신을 사회와 나누는 뜻깊은 자리”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박물관 측은 전시 기간 동안 다양한 연계 교육·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학내 구성원은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문을 활짝 열고 있다.
개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연세보감 – 연세 보물을 비추다》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문화유산을 보여준다. 삼국유사부터 아날로그 컴퓨터, 그리고 오늘의 연세인에 이르기까지, 한 대학이 축적해 온 시간과 기억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공통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번 전시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둘러볼 만한 자리다.
전시는 2026년 3월 26일까지 연세대학교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한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