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직선”이 아니라 “매듭”으로 읽는 전시가 있다. 한국여류조각가회 정기전 《풀어 엮는 시간》은 현대인의 삶에서 반복되는 얽힘과 해체의 국면을 조각이라는 매체로 시각화하고, 다시 관계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만추(晩秋)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전환기 - 무언가를 정리하고, 또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이 가장 현실적인 온도로 내려앉는 때 - 전시는 그 감각을 ‘풀어냄’과 ‘엮음’이라는 두 개의 동사로 번역한다.




《한국여류조각가회 : 풀어 엮는 시간》

2025.11.29. - 12.13

서울아트센터 도암갤러리




이번 전시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어휘가 한국여류조각가회의 역사 자체와 겹쳐 있기 때문이다. 1974년 창립 이후 반세기를 이어온 이 단체는, 남성 중심 조각사라는 단단한 구조 속에서 여성 조각가들이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온 시간의 축적을 품고 있다. 전시는 그 시간을 “목적지를 향한 직선”이 아니라 “서로의 손끝이 만나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온 그물망”으로 설명한다.




곧 제도와 관습을 풀어내는 작업과, 동료/세대/재료와의 연결을 엮어가는 작업이 병행되어 왔다는 자각이다. 제51회 전시회로 마련된 이번 정기전이 “새로운 50년을 향한 첫걸음”이라 선언하는 지점에서, 과거를 기념하는 방식은 ‘완료’가 아니라 ‘재배열’이 된다.


이종애, 〈유기적 공간2112-'언약'〉(2021)



이윤숙 작품 섹션


그 재배열을 가장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장치는 세 개의 2인 기획전이다. 전시는 세대가 다른 작가들을 의도적으로 한 공간에 묶어, 작품을 단순 병치하지 않고 “응답”과 “대화”의 구조로 전환한다. 선배가 걸어온 길과 후배가 개척하는 길이 교차하는 순간, 시간은 연대기적 서열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동시성’이 된다. 이번 2인 기획전 참여작가는 고혜숙×이주현, 안재홍×이용현, 박재연×이윤숙으로 구성되며, 만남의 형식 자체가 전시 주제  - 풀고 엮는 시간 - 의 실험장이 된다.


고혜숙×이주현 작품 섹션


이때 조각은 단지 결과물이 아니라, 재료와 몸이 얽히는 과정으로 다시 정의된다. 돌의 결, 나무의 속삭임, 금속의 저항 같은 물질의 성질은 작가에게 ‘극복 대상’이 아니라 ‘대화 상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 송수영의 전시서문은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의 『The Life of Lines』를 인용하며 “세계는 블록이 아니라 실타래로 짜여 있다”는 관점을 호출하는데, 이는 조각을 고정된 덩어리로 보는 감각을 뒤집는다. 여기서 삶은 점과 점을 잇는 단순 이동이 아니라, 선을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과정이며, 조각은 그 선을 물질 속에서 깨워내는 행위가 된다. 작가들은 “행위 주체(sentient practitioners)”로서 “능동적 물질(active materials)”과의 대화를 통해 작품의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선언은, 작품을 ‘보는’ 행위가 곧 관계의 그물망을 ‘읽는’ 행위가 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풀어 엮는 시간》이 관객에게 건네는 질문은 명료하다. 우리는 완성된 작품만을 소비하는가, 아니면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의 시간 - 재료가 변형되고, 손이 주저하고, 선택이 누적되는 시간 - 까지 함께 사유하는가. 더 나아가 작가들 간의 연대가 축적해온 공동체의 시간, 그리고 관객과 작품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현재의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 새 매듭을 생성하는가. 전시는 바로 그 ‘현재의 매듭’을 목격하도록 관객을 초대한다.



김정희, 〈Space 2022-IDEA〉(2022)


이번 정기전에는 다음의 참여작가가 함께한다. 강선희, 김리현, 김문영, 김선, 김성연, 김순임, 김영란, 김정연, 김정희, 김하림, 김희용, 나진숙, 백연수, 백인정, 서광옥, 손정은, 송수영, 신유자, 신은숙, 신은주, 신지안, 심부섭, 심영철, 양희연, 오귀원, 윤지해, 이경희, 이은영, 이재신, 이정미, 이정진, 이종애, 이해경, 이희진, 임순자, 전소희, 정미숙, 정소영, 조성옥, 조숙의, 조정화, 지연신, 채송화, 최미애, 최미정, 최은정, 허정은, 홍애경, 황인자, 황지선. 한국여류조각가회 17대 회장 임순자의 초대 글은 전시의 온도를 한층 더 분명히 한다. “따뜻한 마음”이라는 문장은 수사로 끝나지 않는다. 풀어내고 엮어가는 일은 사실, 단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그 기술을 조각의 언어로 번역해, 우리 앞에 다시 묶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