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즉흥성과 역사적 서사의 경계에서
이광(b.1970)의 작업은 한눈에 보기에도 복합적이다. 화면에는 팝적인 색감과 전통 회화의 흔적이 공존하고, 그 사이로는 민중미술을 연상시키는 군인의 실루엣, 고문 장면과 같은 폭력의 이미지들이 스며 있다. 전통, 현실, 환상, 그리고 폭력의 서사가 충돌하며 형성되는 이 세계는 그의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질문이 맞물린 결과다.
이광 작가
갤러리마리에서 지난 11월 18일부터 12월 2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1946년 대구 시월항쟁이다. 이광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마주하며, 개인이 겪는 고통과 사회·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역사를 알면 알수록 참 가슴 아프다”라고 회상하며, 이러한 현실적 배경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담아냈다고 설명한다. 이는 그가 과거 작업에서 가자-이스라엘 전쟁을 다루었던 맥락과도 이어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일한 장면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초현실적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시전경
추상에서 이미지로, 혼돈으로 시작되는 회화
이광의 작업 방식은 전통 회화의 철저한 계획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작품의 시작을 “무질서, 혼돈 상태에서 출발하는 추상화”라고 표현한다. 초기의 큰 화면을 완성한 뒤, 점점 부분으로 파고들면서 디테일과 상징이 생겨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독일어로 ‘Übermalen(위버말렌)’, 즉 ‘덧칠하기’의 개념과 연결해 설명한다. 추상적 레이어 위에 형상이 올라오고, 다시 덮이고, 지워지고, 다시 등장하는 반복이 그의 회화를 구성한다.
이는 한국의 불화나 전통 회화처럼 치밀한 계획과 장인적 공정을 필요로 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즉흥성을 핵심 원리로 삼는 서양적 회화 감각에 기반한다. 그는 “계획된 완벽성을 추구하면 화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힘이 약해진다”고 말한다. 즉흥적 붓질과 우연한 형상들은 단순한 실수나 과정의 흔적이 아니라, 작품이 완성되는 방식 그 자체다.

〈블랙피에타_가시리〉(2022), 〈블랙피에타〉(2022)
작품의 완성 시점을 묻는 질문에서 그는 잭슨 폴록의 유명한 일화를 꺼낸다. 폴록이 “사랑이 끝났을 때를 어떻게 아느냐”는 비유로 답했던 것처럼, 이광도 “저절로 안다”고 말한다. 그는 완벽함을 “재료상의 완벽이 아니라, 시간·공간·감각이 일치하는 순간 느껴지는 조화”라고 설명한다. 계획이 아닌 감각의 통합으로 작품의 끝을 결정하는 셈이다.

〈학익진_사람 아닌 사람들의 기습〉(2025)
아이콘적 이미지, 전통적 은유, 그리고 우연의 발견
이광의 화면에는 반인반수의 호랑이 여인과 같은 형태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러한 형상조차 “즉흥의 순간 우연히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우연 속에서 미륵상이나 종교적 아이콘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나타난 순간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작품에 금실을 드리우는 장치를 더했다.

〈호랑이여자 KL5〉(2025)
그 이유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액자를 통해 관객과 작품 사이에 거리를 두었던 방식, 그리고 전통 종교 이미지가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을 가려 보여주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일종의 아이콘(icon)과 현대적 회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아크릴 글라스
흥미롭게도, 진중한 서사와 다르게 전시장에는 일상에 지친 관람객을 배려하는 요소도 존재한다. 반투명 아크릴 글라스에 투사된 호랑이 여인의 형상은 관객의 모습을 겹쳐 비추며, 마치 얼굴을 ‘쓰듯이’ 체험하게 만든다. 이광은 이러한 장치를 “현실에 비춰지는 또 하나의 환영”이라 설명한다. 관객이 작품 속 존재와 마주하거나 겹쳐질 때, 그 장면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광의 회화는 즉흥성과 서사, 현실과 비현실, 역사적 고통과 환상적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며 공존하는 장이다. 그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회화적 본능, 개인적 기억과 역사적 비극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회화 바깥의 공간을 향해 확장되는 설치적 감각을 결합한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작가가 구축해 나가고 있는 작업 세계는, 단순히 국경의 범주를 넘어, 동시대 회화가 가질 수 있는 복합적 층위를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실천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