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을 깨고 상상을 디자인하다, 강릉 디자인씽킹뮤지엄
강릉시 구정면에 위치한 디자인씽킹뮤지엄은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다. 과거 사설 교육기관이었던 3개 동의 건물을 활용한 이 공간은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강릉의 문화 인프라 확충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방대한 개인 컬렉션이 만나 2015년에 탄생했다.

뮤지엄 입구
초기 ‘마마세계저울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희귀 저울 콘텐츠를 선보였으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이보람 관장은 과감한 리브랜딩을 단행했다. 자신의 전공인 디자인학을 접목해 유물을 유리관 속에 가두는 방식에서 벗어나, 관람객의 니즈에 맞춘 ‘창의적 사고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아래는 이보람 관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보람 관장
Q.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연고가 깊지 않은 강릉에 뮤지엄의 터전을 잡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박사 학위 과정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오랜 타국 생활을 뒤로하고 강릉에 자리 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머니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박사 학위 교육자이신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서 컬렉션을 수집하며 예술적 소양을 키웠고, 귀족 가문의 저울과 같은 유물들을 모으는 과정에서도 어머니와 깊게 교감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귀국을 결정했을 때, 자연스럽게 외가가 있는 강릉의 인문학적 토양 위에 내가 경험한 디자인씽킹의 가치를 심어보고자 결심했다.

뮤지엄 신내 통로
Q. 서양화와 디자인학을 전공했다. 뮤지엄 운영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학부에서 서양화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석사를,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에서 디자인학 박사를 마쳤다. 영국 유학 시절 주영 한국문화원에서 활동하며 전시기획 업무를 익혔다. 디자인씽킹은 '사용자의 요구를 파악해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 사고'를 뜻한다. 우리 뮤지엄도 박물관(Museum)이라는 정적인 틀에 갇히지 않고, 시각 예술과 인문학을 결합해 방문객이 새로운 영감을 얻어갈 수 있도록 전시 기법을 설계했다.
Q. '디자인씽킹뮤지엄' 이전에는 '마마세계저울박물관'이었다고 들었다. 명칭을 변경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초기에는 저울이라는 독특한 소재에 집중한 ‘마마세계저울박물관’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저울이라는 유물 자체가 가진 ‘공정’과 ‘수치’라는 개념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디자인적 가치와 인간의 창의성을 더 넓게 공유하고 싶었다. 이전의 방대한 저울 아카이브는 현재 우리 뮤지엄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고 있다.'

저울 컬렉션
Q. 핵심 콘텐츠인 '저울' 컬렉션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 있나?
저울은 단순히 무게를 재는 도구를 넘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과거 유럽에서는 왕실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귀족 가문만이 저울을 제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소장한 프랑스 리옹의 저울이나 포르투갈의 장식 저울들을 보면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웅장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경제적 가치를 치환하는 도구가 현대에 와서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 된 과정을 디자인씽킹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한다.

정희성 作
Q. 문학과의 협업이 독특하다. 정희성, 강은교 시인의 전시를 기획한 배경은?
문학적 상상력은 시각예술의 형상화 과정에 깊은 영감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된다. 정희성 시인의 노동과 사랑, 강은교 시인의 은유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강은교 시인이 밤길 화물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호박마차' 같다고 한 대목에서 영감을 얻어 실제 조형물을 제작했다. 작가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하여 관람객이 문학을 더 가깝게 느끼길 바랐다.
Q. 수많은 소장품 중에서도 관장님께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애장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한국연구재단 사업으로 포닥(Post-Doc,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던 시기의 일이다. 당시 학생 신분을 벗어나 처음으로 월급을 받게 되었는데, 그 소중한 월급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적금을 붓듯 매달 인사동의 한 고가구점 사장님께 보냈다. 그분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사학을 전공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의 진위 판별 위원으로도 활동하셨던 권위 있는 분이었다. 내가 성실하게 모은 돈이 일정 금액 쌓였을 때, 그 사장님께서 처음으로 내주신 기물이 바로 '용이 그려진 청화백자 항아리'였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흘린 땀방울이 켜켜이 쌓여 귀한 유물로 치환된 경험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금은 수장고에 소중히 보관 중이다.
Q. 최근 강원특별자치도박물관협의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향후 비전은?
강원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연대하여 지역 문화 자산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목표다. 강릉은 인문학적 토양이 깊은 곳이다. 지역 사회와 상생하면서도, 삼화페인트와의 컬러 협업이나 AI 작가 전시처럼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뮤지엄은 3개 동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제1관 '민속과 저울의 역사': 8도 반다지와 고려 토기 등 한국의 미와 유럽 귀족 사회의 저울 컬렉션이 공존한다. 특히 프랑스 왕실에서 사용한 대형 저울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과거 '마마세계저울박물관'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제2관 '예술과 공예의 만남': 유니세프 선정 남미 작가들의 세밀한 공예품과 안예완 작가의 '꽃보자기' 연작, 오만철 작가의 '도자 회화'가 전시된다. 전통의 물성과 현대적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제3관 '문학과 상상의 숲': 정희성·강은교 시인의 시화와 AI가 그린 동화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야외로 이어지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대나무 숲'과 26마리의 토끼가 자유롭게 뛰노는 동산은 체험 프로그램의 정점이다. 토끼를 가두지 않고 동산을 만들어 교감하게 하는 방식은 특기할만하다.

방문 횟수에 따라 혜택이 늘어나는 VIP 평생 회원 제도는 박물관 운영에 대한 이보람 관장의 자신감을 증명한다. 단순히 유물을 관람하는 장소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콘텐츠를 통해 재방문 동기를 부여한다. 강릉의 새로운 문화 이정표로 자리 잡은 디자인씽킹뮤지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관람객의 상상을 현실로 디자인하고 있다.

[이용 안내]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정등로 130
문의: 033-823-2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