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현실에서 내면의 사유로, 이종구의 회화가 도착한 자리

1980년대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농민과 농촌의 현실을 그려온 이종구가 이번에는 ‘사유(思惟)’를 들고 돌아왔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사유 : 思惟》(2026.5.20-6.20)는 그간 외부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응시해온 작가가 코로나19 팬데믹, 질병, 정년퇴임이라는 삶의 전환점을 통과하며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결과를 보여준다. 전시는 38점의 회화를 통해 생명, 죽음, 고통, 치유, 평화의 문제를 다룬다.

〈사유_월인천강〉(2026)

이종구는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대표 작가다. 그는 누런 양곡 포대 위에 농민의 얼굴과 농촌의 풍경을 그리며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사라져가는 삶의 현장을 붙들었다. 그의 회화는 한때 ‘그림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다. 농민, 농촌, 대추리, 촛불집회 등 동시대의 현장은 그의 화면 안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그런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선택한 중심 도상은 뜻밖에도 반가사유상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자주 찾고, 불상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설명했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불상의 형상은, 격렬한 현장을 통과한 화가가 도달한 깊은 침묵의 얼굴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형식은 두 개의 캔버스를 하나로 결합한 구조다. 한쪽에는 반가사유상이나 좌불상이 놓이고, 다른 한쪽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 흐르는 물, 불꽃, 황금, 나무, 촛불 등이 배치된다. 둘로 나뉜 화면은 서로 다른 세계를 병치하는 듯하지만, 결국 하나의 회화로 묶인다. 이는 작가가 말하는 불이(不二)의 사상을 회화적으로 구현한 장치다. 삶과 죽음, 고통과 평화,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는 서로 대립하는 둘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존하고 순환하는 하나의 관계라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이종구 작가

이러한 사유는 특히 자화상 작업에서 구체적인 몸을 얻는다. ‘사유_생로병사2’에서 작가는 환자복을 입고 수액 거치대를 붙든 자신의 모습과, 정장을 입고 휴대전화를 든 자신의 모습을 나란히 세운다. 병원에서는 살기 위해 링거를 붙들고, 퇴원 후에는 생계를 위해 휴대전화를 붙든다는 작가의 말은 냉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여기서 사유는 추상적 명상이나 관념적 사색이 아니다. 아픈 몸, 늙어가는 몸, 노동하는 몸, 살아남아야 하는 몸에서 출발하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전시전경

김준기의 평론이 짚듯, 이종구의 이번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몸의 사유’다. 반가사유상은 종교적 숭고와 예술적 완결성을 지닌 상징이지만, 그 곁에 놓인 인간의 나체와 자화상은 생로병사의 조건 안에 놓인 유한한 존재를 드러낸다. 부처와 인간, 성스러운 형상과 날것의 몸, 침묵과 고통이 한 화면 안에서 서로를 비춘다. 이 병치는 종교적 도상의 권위를 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 또한 사물이고, 인간의 몸 또한 사물이라는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 성과 속의 경계를 다시 묻는다.

〈나무〉(2025) 시리즈

전시장에는 오래된 나무를 그린 연작도 함께 놓인다. 천년을 넘긴 고목 아래 아이와 중년,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등장하는 화면은 한 생명의 주기를 넘어 인류 보편의 생로병사를 풍경처럼 펼쳐 보인다. 진돗개와 반가사유상을 함께 둔 작품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선종의 화두를 떠올리게 하고, 촛불을 바라보는 반가사유상은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문제를 오늘의 현실로 불러온다. 전쟁과 기후 재난, 사회적 폭력의 시대에 이종구는 비극을 직접 고발하기보다, 불상의 고요한 눈을 통해 그 고통을 관조하게 한다.

그렇다고 그의 회화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전시는 리얼리즘의 방향이 외부 현실의 재현에서 내면의 현실 탐구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그의 붓이 사회의 모순을 겨누는 날카로운 도구였다면, 지금의 붓은 상처 입은 시대를 오래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손에 가깝다. 싸움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고백은 패배의 언어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응시를 요청하는 말로 들린다.

〈지리산 법계사〉(2025)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작가

《사유 : 思惟》에서 이종구는 반가사유상을 통해 평화를 말한다. 그러나 그 평화는 쉽게 얻어지는 위안이나 장식적 고요가 아니다. 질병과 노화, 노동과 생계, 죽음의 공포와 사회적 갈등을 통과한 뒤에야 가까스로 도달하는 침묵이다. 세상이 극단으로 치닫고, 소유와 착취, 차별과 혐오가 반복되는 지금, 이종구의 회화는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생각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가. 그의 ‘사유’는 현실에서 물러난 자의 명상이 아니라, 현실을 끝까지 통과한 자가 다시 인간과 생명과 평화를 생각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