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주, 세상의 모든 안녕을 위하여


고충환 | 미술평론가


안녕을 짓다. 그동안 이런저런 주제가 있었지만, 가장 최근의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그동안의 다른 주제를 아우르는 큰 주제라고 해도 좋다. 작가 고은주가 그림을 그리고(평면) 만드는(입체와 공간설치작업)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유와 당위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다. 보통은 집을 지을 때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안녕의 집을 짓고, 안녕의 구조를 세우고, 안녕의 성소를 짓고, 안녕의 제단을 짓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모든 작업은 어쩌면 저마다 자기 내면에 집을 짓는 일이며 행위일 수 있다. 질서의 성소를 짓고, 우연하고 무분별한, 건강한 생명력의 집을 짓는 것과 같은(니체는 저작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 충동을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구분하면서, 질서와 생명력을 대비시킨 적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안녕의 집을 짓는다. 왜 안녕인가. 안녕의 집을 짓는다는 주제는 왠지 실제로는 안녕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역설적 표현처럼 들리고, 그런 작가의 현실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는 안녕하지 못한 현실? 현대인은 불안하고, 그 삶은 불안정하다. 불안은 그가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가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사는 한, 자기를 억압하는 삶을 살고, 언제 어떻게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올지 모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프로이트는 이 알 수 없는 불안을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했고, 슬라보예 지젝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 비유되는,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이라고 했다). 

여기에 현대인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니체), 중심을 상실하고(한스 제들마이어), 고향을 상실하고(게오르그 짐멜), 자기(정체성)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상실한 마음을 기댈 곳이 없다. 이처럼 억압된 삶을 사는, 상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불안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그만큼 안녕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래서 작가는 안녕을 그리고 만든다. 이미지로나마 불안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고 싶어서이다. 공교롭게도 전통적으로 이미지는 주술적인 기능을 수행해온 부분이 있다(전형적인 경우로는 부적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가 제안해놓고 있는 안녕의 아이콘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불안을 잠재우고 다독여주는 주술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역설적으로 불안한 현실과 불안정한 삶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진정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작가는 먼저 타로카드의 형식을 가져온다. 점을 통해 불안한 현실과 알 수 없는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미리 알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작업의 가장 기초적인 베이스로서 운명의 카드를 펼쳐 보인 것이다. 운명의 전을 펼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위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등장한 행복의 아이콘들, 행운의 아이콘들, 안녕의 아이콘들을 화면 위에 불러 모은다. 신화적인 아이콘도 있고(천마와 페가수스 같은), 종교적인 아이콘도 있고(만다라와 탱화를 차용하고 각색한 것 같은), 문화적인 차이를 반영한 생활사적 아이콘도 있다(가문을 표시한 문장과 같은). 그리고 여기에 비트코인과 제프 쿤스가 만든, 막대풍선 푸들 조형물과 같은 동시대적 아이콘이 보인다. 

그 상징적 의미를 알만한 경우를 중심으로 추려보면,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클로버와 말 편자, 벌과 무당벌레, 행복을 상징하는 은방울꽃,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과 왕홀, 재물을 상징하는 금수저와 황금열쇠, 동전과 보석, 관계와 연결, 보호와 결속을 상징하는 매듭과 리본, 끈과 식물 넝쿨, 길조로 여겨지는 원앙과 봉황, 햇살처럼 뻗어나가는 빗살무늬, 사랑을 부르는 큐피드, 사랑을 유혹하는 향수병,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 반복되는 주문을 통해 염원을 실현하는 앵무새, 세상을 꿰뚫어 보는 부릅뜬 눈, 부활을 상징하는 달걀, 애벌레를 벗고 날아오르는, 변신을 상징하는 나비, 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스카프, 그리고 좋은 기운을 부르는 이런저런 주물들이 보인다. 

원래 저마다 속해있던 맥락이 있을 것이지만, 그 맥락 속에서 크게 혹은 작게 다른 의미를 의미했을 것이지만, 작가는 이 모티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안녕의 아이콘이 되게 만든다. 여기서 작가는 의미론을 건드린다. 의미는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결정되는가. 의미 자체는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텅 빈 채로 있다. 의미가 의미로 될 때는 언제나 맥락 속에서다. 이런저런 맥락 속에서 의미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맥락이 의미를 낳는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 맥락 결정적이다. 다시,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여기서 작가는 탈맥락과 재맥락의 과정을 수행하면서, 크게 혹은 작게 차이 나는 의미들이 하나같이 안녕을 의미하게 만든다. 여기에 작가는 편집과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브리콜레르와 브리콜라주(차이 나는 것들, 다른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그러모아 제3의 다른 현실을 제안하는)를 수행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빛을 투과하는 성질의 반투명한 한지를 오려 붙여 만든 조형물을 공간에 설치하기도 하고, 공중에 매달거나 한다. 전통 무속에서 얇은 한지를 칼로 파서 문양을 뜨는, 귀신을 가둘 목적으로 굿을 할 때 쓰는 무구를 의미하는 설위설경을 가져와 자기식으로 각색하고 번안한 것이라고 했다. 종이꽃으로 만든 지화도 그렇지만 이런 한지 조형물은 전통 무속에서 죽은 자와 관련이 깊고, 귀신과 관련이 깊고, 영적인 존재와 관련이 깊다.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유령은 색과 형태로 드러난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예술과도 관련이 깊고, 영적 환기에 바탕 한 영성주의의 회화적 경향성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입체 조형 작업은 이런 비가시적인 존재를 비가시적인 존재의 층위로부터 가시적인 층위로 불러내는 주술적인 장치로 보면 되겠다. 설치 방법을 보면 기본적으로 가변적인데, 무슨 호위무사처럼 입체 조형물이 앞에 서고, 평면 오브제들이 뒤편 공중에 매달리면서 배경을 이루는 식이 제단처럼 보인다. 귀신을 부르고(초혼) 가두는, 안녕의 제단을 즉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 그림자 조형이 주목되는데, 공중에 매달린 평면 오브제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새 나가면서 뒤쪽 벽면에 흑백의 그림자를 만든다. 종이 조형물 자체가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공)를 위한 것이고, 여기에 비가시적인 존재의 또 다른 물적 형식(형상)이랄 수 있는 그림자(허)가 더해진다. 그렇게 안녕을 기원하는 영적 존재들의 거소가 지상 위에 마련된다. 

앞서 이런 종이를 소재로 한 입체 조형물과 공간설치작업이 가변적이라고 했다. 작가는 임진왜란 당시 연을 띄워 신호를 보낸 사례를 가져와 또 다른 안녕의 아이콘을 만든다. 이런 형태의 연에 전진하고 저런 형태의 연에 후퇴하는, 연을 매개로 한 신호체계에서처럼 안녕의 이런저런 경우들을 다양한 연의 형태를 빌려 다르게 표현하고 조형한다. 얼핏 보기에 가부좌를 튼 명상적인 형상을, 그리고 달과 구름과 별이 어우러진 하늘(우주?) 정도를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자체 결정적이라기보다는 관객들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는, 안녕이 실현되는, 그런, 열린 의미구조를 예시해주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세상의 모든 행복의 아이콘과 행운의 아이콘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안녕의 집을 짓고, 안녕의 제단을 세웠다. 그 옛날(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이미지가 주술적인 기능을 수행했던 것처럼 그 집(성소)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불안을 잠재우고 위로받기를 바라면서.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평안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