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선/ 종이인간을 통해 본 세상, 현실, 그리고 존재 


고충환 | 미술평론가



종이인간.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종이와 인쇄술을 들 수 있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 이후 인간은 비로소 문명의, 특히 문화의 시대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생각과 감정을 종이에 옮겨 적어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기록된 생각과 감정을 널리 퍼트려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사상과 역사, 그리고 제도(적 장치)에 바탕 한 거대 담론의 형성과정에 종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중요한 종이지만, 종이 자체는 한없이 가볍고 연약하다. 작가는 이처럼 가볍고 연약한 종이를 접어 종이인간을 만들었다. 자기를 대리하는 아바타 혹은 캐릭터로서 종이인간을 제안한 것인데, 의미로는 중요하지만, 물성으로는 가볍고 연약한 것에서 인간과 존재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함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를 대리하는, 결정적이고 비결정적인(가변적인), 중요하고 연약한,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그러므로 타고난 모순과 부조리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종이인간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여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디오라마(이동식 극장)로 만들었다. 집을 찾아 떠나는 것이지만, 여기서 집은 상실한 자기가 유래한 근원을 의미하는 것인 만큼, 사실상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여기에는 잊힌 자기, 잃어버린 자기를 되묻는 자기반성적인 부분이 있다. 보편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장애물과 조력자가 기다리고 있는, 우여곡절 끝에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는, 영웅 서사에 바탕 한 성장 서사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이런 예술의 정의를 자기만의 서사와 형식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떠나온 길 위에서 종이인간은 미운 종이새끼(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는다(여기서 작가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를 건드린다). 물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며 자기부정(혹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나르시스의 신화), 낯선 곳에서 길을 잃는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번민으로 시계추처럼 흔들리기도 하고(르네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대지의 여신을 만나 새로운 에너지를 수혈받는다(프리다 칼로). 푸른 발을 가진 부비새에게 붙잡혔을 때는 부비새처럼 자기 발을 파랗게 칠하기도 하고, 붉은 포식자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는 포식자처럼 자기 팔을 붉은색으로 칠했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위장도 해보고, 해골 무덤 앞에서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보기도 했지만(메멘토모리), 아무 데서나 시작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는, 우연에 던져진, 열린, 하이퍼텍스트처럼 끝내 그 결말을 알 수는 없다. 알 도리가 없다. 삶이 꼭 그렇지 않은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종이인간을 매개로, 동화와 우화, 신화와 미술사를 매개로 삶의 서사를 재구성하고 있었고, 그 서사는 작가 개인의 서사를 넘어 우리 모두의 서사로 확대재생산 되고 있었다. 


네가 먹는 것이 너를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가게를 차렸다. 상품 진열대가 있고, 진열된 상품을 담아 이동할 수 있는 카트가 놓여있는. 가판대 위에는 각종 상품이, 특히 온갖 과자류가 진열돼 있는데, 종이깡(새우깡)이 있고, 종이링(양파링)이 있고, 종이밥(고래밥)이 있고, 오!종이(마른 오징어?)가 있다. 봉지를 보면, 오!종이 볶음 레시피도 있고, 풍부한 인간미(아마도 인절미), 오리지널 인간미 100%, 라고 적힌 문구도 있다. 인간미가(아니면 인간미로) 번아웃된 사람들이 먹으면, 다시 인간미를 100% 충전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잃어버린 인간미를 재차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은, 인간미가 없는 세상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또 다른 가판대에는 각 삶, 죽음, 고독, 진리, 기억, 친절, 슬픔, 분노, 지혜, 돈, 꿈, 용기, 행복, 사랑, 승리, 라고 적힌 과자봉지가 진열돼 있다. 여기서 네가 먹는 것이 너를 만든다(세상으로부터 흡수하는 것이 너를 만들고, 너의 인격을 형성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중 너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현재 너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 라고 작가는 묻는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지만, 그렇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지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한다면, 자유와 책임이 함께 하는 부조리를 피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웃자고 한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할까. 꼭 그 일(웃자고 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봉지 귀퉁이에 평화로운 에덴, 이라는 제조사명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인간미 100%라는, 과자봉지에 적힌 문구가 사실은 인간미가 없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듯, 이 역시 사실은 평화롭지 않은 현실을 우화적으로 비튼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유토피아(낙원)와 디스토피아(파국적인 현실), 그리고 헤테로토피아(억압이 차곡차곡 쟁여지는, 소수자들의 장소, 탈장소 그러므로 부재 하는 장소)를 매개로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있다. 상품미학을 매개로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가속하는 현실에 대한 풍자가 있고, 농담(움베르토 에코)이 있고, 씁쓸한, 아니면 시니컬한 유머(밀란 쿤데라)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무엇보다도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힘(존 버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