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나타났다. 양치기 소년이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와 늑대가 없는 것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양치기 소년이 신이 나서 또 외쳤습니다. 다시 사람들이 달려와 늑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양치기 소년이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거짓말이겠거니 하면서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면 벌을 받는다는, 널리 알려진 동화다. 그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개 동화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을 지향한다. 어떤 일이 착한 일이고 어떤 일이 나쁜 일인지 학습시켜 아이들이 건전하고 건강한 의식의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다. 여기까지가 동화의 표면적인 의미다. 모든 일이 그렇듯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적인 의미는 다르다. 동화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의미를 숨겨놓고 있다. 그게 뭔가. 어떤 일이 착한 일이고 또한 나쁜 일인지 누가 결정하는가(미셸 푸코의 누가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조르조 아감벤의 누가 표시하는가, 그러므로 누가 낙인을 찍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겉보기엔 도덕과 윤리, 상식과 합리, 그리고 공동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제도적 주체와 같은 당대의 지배계급이 결정한다. 상식적이라고 하는데, 합리적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여기에 집단지성이라고 하는데 누가 반기를 들 것인가.
그 결정에는 상대적인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일반화하는 문제가 있고, 그 과정에서 아이로 대변되는 순진무구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성적 소수자와 같은 타자의 의견이 소외되는 문제가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치)가 당위를 얻으면,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치)가 억압된다. 그렇게 동화에 억압된 이야기를 복원한 것이, 억압된 목소리에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 준 것이 잔혹동화다. 작가 김기태의 그림은 이런 잔혹동화를 매개로 한 재독서와 관련이 깊다.
늑대가 양을 물어 죽였다. 그때 양치기는 자고 있었다. 목장주가 양치기를 고발했고, 경찰이 왔다. 판사 앞에서 양치기는 자신의 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목장주는 양치기의 양을 지킬 책무를 주장했다. 그리고 늑대는 다만 타고난 본성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판사는 늑대의 본성을 인정하면서, 양치기가 죽은 양의 값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분노한 양치기는 복수를 위해 숲속으로 늑대를 찾아갔지만, 정작 늑대와 마주쳤을 때 양치기는 흠칫 뒤로 물러나다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우연히 곁을 지나던 여자가 양치기를 구해주었지만, 양치기는 죽은 양의 값을 물어주고 남은 금화 주머니를 여자가 훔쳐 갔다고 의심했다. 사실은 양치기가 웅덩이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것이지만, 여자는 그런 건 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늑대가 나타나 그 여자가 너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수도 있는데, 하면서 양치기를 비웃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의 후속편일 수도 있겠고, 양치기 소년 이야기에 숨은(그러므로 억압된) 뜻일 수도 있겠다. 세대를 떠나 공통으로 드러나는 갑질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 작업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성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준다고, 작가 노트에 적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빌려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한 것일 수도 있겠다.
원전을 차용하고 각색하고 재해석한 것을 패러디라고 한다. 조형예술의 경우, 보통은 이미지를 이미지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야기를 또 다른 이야기로 옮긴 것이 이례적이다. 원전에서 파생된 제3의 텍스트라고 해야 할까.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시나리오도 쓰고 소설도 쓰는 일부 작가들이 있다. 시나리오 혹은 소설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고, 영상설치작업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작가들이다. 김기태 작가의 작업 역시 향후 텍스트와 평면 회화 그리고 영상설치작업(특히 영상설치작업의 경우, 작가의 그림은 영화 장면을, 시퀀스를,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연속그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도 연속그림을 길게 이어 붙여 파노라마식의 서사적 전개를 꾀한 경우의 그림이 주목된다)이 하나로 어우러진 미래를 그려봐도 좋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로 구분한 적이 있다. 다만 작가가 기술한 대로 읽히는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부르는(행간과 이면과 여백으로 구멍이 숭숭한, 혹은 간섭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라고 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라는 원전을 재해석해 자기만의 제3의 서사를 상상하는 작가의 행위와 이에 바탕 한 작업은 그러므로 원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간섭하는 능동적인 독자로서의 태도를 예시해준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동화적 현실을 당대적 현실에 결부시키면서,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해도 좋을 우화적 현실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동화가 동화적 현실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적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동화 속 이야기를 빌려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사는 현대인의 삶의 질을 빗댄(이를테면 갑질하는 인간과 어리석은 인간을 고발하는 것과 같은), 삶의 알레고리를 표현해놓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서사적이다. 영화적이다.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바탕 한 만큼 그 자체 독자적인 그림으로서보다는 연속적인 서사구조의 한 부분처럼 보이고, 큰 이야기에서 떨어져나온 한 단락처럼 보인다. 그렇게 토막 난 그림 속에서 붉은 머리의 한 남자가 얼굴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다. 자기를 연민하는가. 괴로운가. 갈등하는가. 알 도리가 없다. 그 앞에는 쏟아진 금괴가 보인다. 여자가 다리 뒤쪽으로 지나가면서 이 모습을 흘낏 본다. 사실을 말하자면, 다리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노을로 붉게 물든 황량한, 삭막한, 외떨어진 마을 어귀에 머리에 금관을 쓴 사람이 뭔가를 쏟아붓고 있다. 통의 생김새나 검은 액체로 보아 기름일 것이다. 그 기름에 불이 붙었다. 불이 노을에 화답하는 것 같다. 불과 노을이 공모하는 것도 같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공모의 매개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공모?
하나같이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의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도 같고, 낙심한 것도 같고, 억울한 것도 같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도 같고, 자포자기한 것도 같고, 자기 연민에 빠진 것도 같다. 그런데 그들은 왜 머리에 관을 쓰고 있을까. 머리에 쓴 관은 무슨 의미일까. 그들 앞에 작은 글씨로 솔드아웃, 이라는 영문자가 적힌 팻말이 보인다. 팔 수 있는 것을 다 팔고,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일까. 바닥이라는 의미일까. 그런데, 무엇이 바닥이라는 의미일까. 그들이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이 관일까, 아니면 의자일까. 정황상 의자 같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매사에 그런 식이다. 모든 그림이 그런 식이다. 그 자체 독자적인 그림으로서보다는 큰 서사에 종속된 작은 서사 같고, 서사의 한 단락 같고,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삶의 서사를 함축한 장면 같다. 그리고 여기에 밤의 여행자가 있다. 이 모든 삶의 장면 장면을 낱낱이 보고 겪은 삶의 주체일 수도 있고, 그 장면들을 설계한 삶의 주재자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밤인가. 삶이라는 밤? 삶이라는 어둠? 그렇게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를 여행자가 밤이라는, 어둠이라는, 삶의 장면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환상 리얼리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이야기하기 위해 산다고 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되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동화와 우화에 바탕 한, 이야기가 있는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상황극 같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도 같고 연극을 보는 것도 같은, 작가의 그림이 앞으로 서사를 매개로 어떤 또 다른 부조리한 삶을 어떻게 논평할지, 그러므로 현실에 어떤 환상을 어떻게 부여할지, 그 유비적인 표현을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