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미학적 진실을 향하여

1. 기억의 정치와 선형적 시간의 해체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는 완고한 선형적 관념은 우리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 선형적 시간관은 유한한 인간이 광활하고 복잡한 세계를 인지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개념적 틀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공한 이 틀은, 곧 제도적 권력에 의해 노동과 생산, 행정과 질서, 집단적 실천을 조직하는 통치 인프라에 기여하였다. 특히 국가와 미디어는 '객관적 기록'이라는 명분을 갖춘 사진을 동원하여 실존의 공간을 조각내어 붙임으로써 가상의 시간선(時間線)을 양산했다. 이는 진실을 왜곡한 채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간선은 현재의 필요에 맞춰 과거를 가공하고, 고착하고, 신화화하여 '기억의 정치학'을 수행한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는 권력의 일방적인 폭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저변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의 파편과 실존적 혼돈을 견디지 못하고 시간을 인과관계라는 그럴듯한 서사로 엮어내려는 인간의 ‘스토리텔링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인간은 희로애락이 복잡하게 얽힌 혼돈의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인과관계로 가상의 시간선을 직조하는데 애써 매달린다. 사진은 이러한 인간의 내밀한 허구적 욕망에 '사실성'이라는 환상을 제공하여 기억의 정치화에 유력한 공모자 역할을 한다.

사진이 인간의 시간과 기억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시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시계판처럼 쪼개진 과학적 시간, 즉 과거·현재·미래로 단절된 시간은 인간이 지각과 통치의 편의를 위해 시간의 개념을 공간화한 왜곡에 불과하다. 실제 시간은 조각낼 수 없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지속(durée)’이다. 과거는 어딘가로 사라져 죽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물처럼 끊임없이 현재로 흘러들어와 ‘지금’이라는 순간의 두께를 형성하는 생생한 현존이다. 존재론의 관점에서 단절된 과거와 미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진은 이와 같은 지속의 시간에 폭력적으로 개입한다.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유동하는 지속의 흐름을 찰나의 단면으로 잘라내어 시간의 흐름을 차단한다. 그렇게 격리된 단면은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그것은 존재했었다(Ça-a-été)”라는 강력한 시각적 기표를 던지며 생생한 현재로부터 유리된 '과거라는 유령'을 불러와 선형적 시간을 만든다. 인간은 박제된 사진 이미지에 자신의 기억을 의탁하고 기억공간을 영점화한다. 그러나 시간의 단절이 불러온 인간 실존의 불안은 잠재해있던 스토리텔링 충동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결국 권력과 미디어가 기획해 놓은 가공의 시간선을 자신이 경험한 시간으로 착각하고 기억의 공간에 담는다.

2. 인간의 스토리텔링 충동과 사진의 구원

‘지속’의 시간개념에 따라 선형적 시간관념을 완전히 소거하면 거기에는 삶과 죽음, 상흔과 사건들이 뒤엉킨 거대한 실존의 공간만이 남는다. 팔십여 년 전 군함도 해저 막장의 고열 속에서 웅크린 채 숨져간 조선인 강제징용 광부의 한 맺힌 인생과, 오늘날 그 장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알고 관광하며 셔터를 누르는 이들의 웃음소리는 선형적 시간의 '과거'와 '현재'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 모든 삶의 파편들은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 군함도(하시마)라는 동일한 물리적·실존적 공간 속에 지속하여 공존한다. 이처럼 과거의 참혹한 상흔과 현재의 평온한 일상이 한 공간에서 기괴하게 충돌하는 감각과 과거나 현재 모두 비극과 영광 중 어느 하나로도 선명히 규정되지 않는 군함도의 불투명한 이미지가 인간의 두려움의 원천이라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적 방어기제로서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안식처다. 시작과 끝이 명징한 인과관계를 구축하려는 이 필사적인 지도제작 과정에서 사진은 가장 확실한 구원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러한 사진의 속성과 공간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국가적 규모로 결합한 현장이 바로 군함도라는 기억의 전쟁터다. 군함도는 근대화의 기술적 풍요와 강제징용의 잔혹한 학대가 하나의 공간에 비선형적으로 뒤엉킨 거대한 모순의 공간이다. 일본 정부는 이 공간에 덮인 가혹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사진을 프로파간다의 무기로 삼았다. 메이지유신 시대의 깨끗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와 미소 짓는 노동자들의 사진만을 골라 유네스코와 도쿄의 산업유산 정보센터에 배치함으로써 군함도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 말기의 비극을 인위적으로 절단했다. 일본의 집단 무의식에 깔린 제국의 영광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러한 역사의 인위적 절단에 공명했고 프레임 밖의 지옥 같은 노동의 공간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국가가 그어놓은 승리의 시간선을 ‘역사’로 수용했다. 

이처럼 국가와 미디어가 던져준 가짜 기억과 대중의 스토리텔링 욕망이 맞물리면서, 비극의 공간은 깨끗이 표백되고 국가 권력이 기획한 허구의 연대기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재갑이 군함도의 무너져가는 콘크리트 잔흔과 조선인 강제징용의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행위는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거세해 버린 공간의 상흔을 현재의 시간에 삽입한 예술적 저항이다. 그가 수평에 가까운 앵글로 포착한 일렁이는 검은 바다는 일천 미터 아래에 존재했던 광부들의 한 맺힌 숨소리를 시각화한다.

3. 허구와 ‘또 하나의 진실’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듯 역사의 기술에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배계급이 만든 정사(正史)도 작가의 예술 작품도 해석이라는 이름의 허구로서, 작가의 의도적 저항이 만들어낸 군함도의 풍경 역시 허구다. 도대체 두 개의 허구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결국 진실은 허구를 만나는 사람들의 ‘해석’에 의해 최종 결정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실천과 제도 속에서 탄생한 예술작품의 진리는 허구와 대면한 비판적 주체의 해석, 곧 작품이 주체에게 제공하는 ‘정신적 등가물’과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신적 등가물의 진정성에 있을 텐데,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여 성급히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방향을 두 허구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묻는 데에서 어느 하나의 허구를 너무도 쉽게 진실로 수용해 온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모호한 의심의 영역에 머물지라도 적어도 지배적 담론이 제공해 온 익숙한 확실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틀은 마련할 수 있다. 

성능경의 <현장7>(1984)은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돕는다. <현장7>은 사진의 사실성과 어떻게든 시간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인간의 스토리텔링 충동, 그리고 ‘주어진 진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인간의 심리에 의문을 던진다. 이 작품이 “1980년 한강 하류로 침투하다 총 맞아 죽은 나이어린 북한 무장공비의 비극적 궤적”이라는 서사적 해석은 작가의 말이 아니라면 사실 근거가 빈약하다. 실제 작품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진은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을 임의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얼핏 무장공비 사건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성능경이 이 사진들을 수집하고 필름 위에 선을 그을 당시, 이 궤적이 어린 공비의 쓸쓸한 죽음의 궤적일지 모른다는 비극적 가능성에 몰입한 상상의 결과물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까 성능경이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가공과 독재적 편집 권력을 폭로하는 냉철한 비판자이기에 앞서 당대의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어린 영혼의 흔적을 깊이 사유하고 그 존재의 무게를 선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그 순간 객관적 사실 여부는 무력해진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모든 과거는 ‘지속’의 시간 속에서만 현존하므로 작가가 선을 긋던 순간 방 안에 감돌던 순수한 상상적 몰입은 한낱 과거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밀도 높은 실존적 공간으로 현재를 구성하며 새로운 진실을 향해간다. 

사진들을 이은 성능경의 선은 관람객의 내면으로 이어지며 그 내면의 스토리텔링 충동을 자극한다. 결국 '공비의 궤적' 운운하는 해석은 작가의 창조적 상상과 관객의 서사적 열망이 결합하여 사후에 생성한 정신적 등가물, ‘또 하나의 진실’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기억이 허구의 산물일진대, 이 역시 예술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일진대 그 진리 생성의 시간차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권력과 미디어가 주입한 ‘주어진 진실’과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도달한 ‘미학적 진실’ 사이에서, 즉 체제의 ‘지배적 허구’와 사진가의 ‘미학적 허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을 뿐이다.

4. 진실을 선택하는 인간다운 방법

사진은 본질적으로 앞뒤 맥락을 삭제함으로써 현실과 기억을 손쉽게 가공하고 왜곡하는 허구적 속성을 지닌 매체다. 그러나 찰나에 포착한 사진의 프레임 속에 작가의 정직한 의도와 현실을 꿰뚫는 순수한 상상력이 채워질 때, 사진은 인간군상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공간과 거기에 움튼 진실의 싹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진이 제시하는 허구적 사실성에 속아서도 안 되지만, 그것이 시간과 사건을 재구성한 서사라는 이유만으로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신뢰하고 연대해야 할 대상은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의 사진첩 속에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대의 징후를 목격하고 그 이면의 실존을 치열하게 사유했던 작가의 시대정신이며, 그 허구적 상상력이 도달한 ‘미학적 진실’ 속에서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 같은 인간과 공동체의 존엄과 가치를 발견하는 관객의 능동적 해석이다. 

《UNPAST: 기억의 지형들》은 매끄러운 연대기와 치밀한 권력의 서사가 은폐한 소위 ‘역사’ 밖의 기억과 풍경을 펼쳐 보인다. 거기에는 전쟁과 무기와 주검, 유교적 남존여비와 불평등, 자본과 노동의 갈등, 이주와 실향의 기억과 같은 ‘이면의 역사’가 있다. 또 AI를 이용하여 인간의 DNA에 있는 기억을 이미지화하고, AI를 인간과 같은 기억의 주체로 삼으려는 실험이 있다. 작가들은 저마다 사진의 사실성과 허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이용하여 과거의 기억을 ‘지나지 않은 과거’로 대체하여 현재로 옮겨놓는다. 여기에 더해진 정교한 기획은 이 사진들을 ‘역사의 잔여’, ‘애도의 형식’, ‘기록되지 않은 기억’, ‘기억의 미래’라는 주제로 분류하여 전시공간을 실존의 생생한 기억의 흔적으로 채우고 역사가 남긴 것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또 기록의 역사에서 배제된 이는 누구이며, 미래의 기억이 어떻게 생성될 것인지를 묻는다. 

《UNPAST》는 물을 뿐, 완결된 서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택의 당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관객에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기억의 정당성과 미래를 결정하는 기억의 엄중함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해석하라는 ‘암묵적 부담감’을 부여한다. 이 전시는 국가나 미디어가 그어놓은 가공의 시간선은 물론 나의 스토리텔링 충동이 만든 모든 기억의 선을 일시 단절하고, 인간의 삶과 사건들로 얽히고설킨 사진 속 실존의 공간으로 함께 들어가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품이 도달한 ‘미학적 진실’을 함께 바라보고 묻고 고뇌하는 실천이야말로 허구로 이루어진 기억의 전쟁터에서 사진을 대하는 가장 인간다운 방식이 아니겠냐고 나지막이 제안한다.

우리는 국가와 미디어 권력과 개인의 스토리텔링 충동이 공모하여 만든 견고한 ‘주어진 허구’와 사진가의 예술적 상상력이 도달한 나중에 찾아오는 ‘미학적 허구’라는 두 영토의 전개 앞에 놓여 있다. 그 중 어느 하나의 허구를 책임감 있게 선택하기를 고민하고 이를 자기만의 의미 있는 기억으로 숙성하는 일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이 선택이 완결된 선택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가는 미완의 선택으로 이후로도 반복될 불가피한 과정임을 아는 일 또한 관객의 몫이다. 기획자들과 작가들이 애써 펼쳐놓은 ‘기억의 지형들’ 앞에서 이제 관객이 생각에 잠길 차례다.

* 《UNPAST》전(2026.09.26-9.30. 인천문화예술회관)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