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뮤지엄 네트워크 펠로십 프로그램으로 서울에서 2주를 보낸 뒤부터 나는 다시 이곳에 오기를 바랐다. 종로의 일본대사관과 평화의 소녀상 근처에 있던 호텔에 다시 머물며 넓은 길과 좁은 골목을 걷고 싶었다. 예전에 찾았던 지하 서점을 찾아다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바르샤바보다 서울에서 보낸 날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의 필자, 2026년 9월 1일
나는 폴란드 남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처음 들은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은 숲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두 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 두 집의 가족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해주셨다. 아마 조부모님 세대부터 쓰이던 이름이었던 듯하다. 나의 조부모님은 독일어를 사용하며 성장했지만 전쟁 뒤 국경이 바뀌면서 폴란드어를 배워야 했다. 이웃집 뒤 작은 개울이었던 국경도 어느 날 멀리 옮겨가 버렸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폴란드에서는 한국의 음악과 전자제품, 자동차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한강의 소설도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모두 폴란드어로 번역되었으며, 2023년에는 바르샤바 우야즈도프스키 성 현대미술센터에서 김환기의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오늘날 폴란드 사람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는 활기차고 역동적이다.
나는 2006년 2월부터 올해 9월까지 적어도 열두 차례 서울을 찾았다. 첫 방문은 새롭게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 싶었던 학부생 시절이었다. 가장 오래 머문 것은 대학원생 때의 5주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아카이브에서 화가 이인성(1912-50)을 연구했다. 지하철역에서 미술관까지 공원을 걸어가면 머리 위로 리프트가 끊임없이 움직였고, 주변 산으로 등산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논문을 쓰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내게 그 풍경은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었다.
이번 서울 방문의 목적은 화가 김병기(1916-2022) 선생님에 대한 연구다. 김병기 선생님은 많은 인터뷰를 남겼고 긴 창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나는 생전에 선생님을 직접 만나 미술에 대한 생각과 평양, 도쿄, 서울, 미국 뉴욕에서 보낸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병기 선생님은 두 집으로 나뉘어 있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했다. 선생님을 통해 나는 한반도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작은 일부가 내 안에 남아, 글로 옮겨지고 이해되고 기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묻는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과거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오늘날 한국의 미술 아카이브는 활발히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이를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사골국 한 그릇으로 속을 채운 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의 검은 소파에 앉는다. 탁자 위에는 김병기 선생님의 도록과 책, 관련 잡지들이 펼쳐져 있다. 나는 흰 보호지에 싸인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펼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