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담는 용기(用器)

  

이선영(미술평론)


  

박은지는 먼저 그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만든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먹 드로잉이 되기 위한 기회를 한 번에 한정하지 않고, 우연이 중첩된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시키는 과정이 뒤따른다. 만들기는 그리기에 비해 정확한 매뉴얼을 따라야 한다. 물론 그것은 실험의 결과로 확립된 그만의 규칙이다. 작품이란 특정 용도를 가진 물건과 달리 열려 있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은 잘 닫아야 열림의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 그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흐르는 물과 그것을 담는 그릇과 비교했다. 물 자체는 고체로 변하지 않는 한 형태화되지 않기에 담긴 그릇에 따른다. 물처럼 유동적인 그의 작품에서 물은 원초적 자연의 대표적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생물이 물이 필요하다는 기본적인 자연의 법칙과 별도로, 인공적인 미시세계, 가령 정보 혁명 시대에 필수인 반도체라는 고밀도 집적 회로 제조 공정이나 대규모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자력 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생각해 보라. 



melting, 2025, mixed media, 45.5.X45.5cm



박은지의 작품에도 미시적 시점이 존재한다. 확대했을 때 빈 공간은 커진다. 그 공간은 여러 층에 자리한 형상들이 자유롭게 만나는 자리가 된다.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닮으려는 인공물이다. 외적이 아닌 내적인 모방, 즉 과정의 모방이다.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유동성의 촉과 결을 살리려는 것은 예술도 마찬가지다. 대학 때부터 시작된 작품의 여정에서 최초의 시작은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었고, 장소와 환경, 그릇에 따라 다른 물은 이상적인 모델로 간주됐다. 요컨대 인간도 그렇게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2024년 개인전 [투명의 깊이] 작가노트에서 ‘우리는 살아가며 타인과 끊임없이 맺어지고 스며들며, 다시 변화하는 과정을 반복한다...관계 속에서 축적되는 감정, 감각, 사고의 흔적들은...중첩과 반복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수행적 차원을 지닌다’고 하면서, 물과 같은 ‘무형의 나는 변화하고 적응하며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흐르는 물은 순리이자 타자와의 관계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를 드러낸다. 시간은 공간과 연동된다. 인간관계에서도 거리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효과를 발하는 지점은 거리로부터 비롯된 관계이지만, 동시에 불확실함을 내포한다. 거친 물질을 다루는 것은 물론, 소통이라는 예민한 영역까지 기계의 몫이 증가되는 현재, 예술은 불확실함이 야기하는 양면성과 게임을 벌인다. 박은지의 작품 속 결정되지 않은 몫, 또는 고정되어 있지만 여러 층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물은 복잡해서 매번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작가가 변화와 변형을 중시한 결과다. 먹 드로잉과 플라스틱이라는 이질적인 소재의 만남은 운동과 구조를 결합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운동이 먼저이지만 구조의 역할도 중요하다. 앙리 포시옹은 [형태의 삶]에서 미술작품은 하나의 멈춤이지만 과거의 한순간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실제로 미술작품은 변화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한다고 말한 바 있다. 



melting, 2025, mixed media, 116.8X91cm



예술은 정해진 코드의 해석이 아닌 ‘끊임없는 의미의 보충을 필요로’(롤랑 바르트) 한다. 그것은 어떤 구조가 하나가 아닌 여러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가는 이러한 가능성을 위해서 이행의 경로를 마련한다. 예술에서 출발과 목적을 결정하는 하나의 본질은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는 종종 철학이란 소통가능한 합리성이나 보편적인 민주적 대화로서의 끊임없는 토론이라는 생각을 품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부정확한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다. 누구든 결코 동일한 구도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대안은 ‘유동적인 교량들’이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어주는 다리들조차도 추론적인 전체를 한정치 않는 분기점들 혹은 우회로들’이다. 예술과 관련된 진정한 철학은 ‘부단한 탈선 혹은 이탈성의 상태’(들뢰즈와 가타리)에 있다. 박은지의 작업에서 고정은 과정을 잘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재현적 작품의 소재는 거울이나 창문처럼 투명한 중성적 그릇에 담는 관례가 있다. 


하지만 추상미술에서는? 재현적이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담는 사각틀을 고수하는 것은 모순이기에 사각틀 자체를 변주하는 현대미술이 또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틀의 변주 그자체가 내용이 되는 진정한 형식주의가 확립됐다. 박은지의 작품에서 점과 선, 번짐과 겹침이 어우러진 먹 드로잉은 인간관계에 대한 비유였지만, 그것은 출발일 뿐 그것이 흘러가는 것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작가도 완전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아니, 그는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작품을 전개한다. 복합매체가 동원되는 최초의 단계는 먹 드로잉 작업이다. 2018년경 오일페인팅과 먹 드로잉을 같이 하다가 2022-2023년경에 먹 드로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묵 드로잉은 선과 면이 쌓이면서 끊어지고 이어지면서 서로의 간섭작용에 의해 결과가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명령이 아닌 대화’와 비교한다. 실제의 결과는 대화 정도가 아니라, 다성(多聲)의 우주다. 



wave,2024,mixed media,가변설치


wave2,2024,mixed media,가변설치



그의 작품은 여러 요소가 섞이기에 무채색으로 중심을 잡아준다. 투명 에폭시를 활용함으로써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의 먹 드로잉을 결합할 수 있다. 그 투명한 미디어가 쌓아서 제시할 수  있는 얇은 종이에 그린 그림은 수십 장까지 가능하다. 먹으로 그린 종이가 젖으면서 반투명하게 되고 여러 층으로 겹쳐진 먹 드로잉들이 가질 수 있는 관계는 많아진다. 그물을 던진 어부처럼 작가는 결과를 기다리고 선택할 뿐이다. 투명 에폭시를 종이 드로잉에 부었을 때 젖은 상태로 굳으니까 반투명하게 된다. 투명 아크릴판에 동양화를 붙이는 경우와 비교될 수 있지만, 가둔 것같은 느낌에 아크릴판 대신 종이에 레진을 직접 붓는 방법을 택했다. 기본은 사각형이지만 판에 열을 가해 변형시켜서 바닥에 가변적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수십 장의 드로잉 층이 투명 미디어 사이로 쌓여가면서 아래층이 위로 올라오기도 하고 다른 층에 겹쳐 가려지기도 한다. 


[melting](2025) 시리즈는 각층에서 어느 부분은 사라지고 어느 부분은 남아서 관계를 형성한다. 작가가 염두에 뒀던 인간관계와 비유하자면 자신만을 고수해서 타자와 섞일 수는 없다. 자기 안의 타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종이 층이 더해지면서 그 위에 그린 형상의 내비침과 덮임이 반복되고 합쳐진다. 한 장의 먹 드로잉 자체에도 우연성이 내재하는데, 여러 장이 동시에 가동되어 공존하면서 우연성은 배가되고, 작가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흔히들 동양화는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는 수정 대신에 대리하고 보충하는 해체적 방식으로 절묘한 만남의 순간을 선택한다. 투명 아크릴 박스에 켜켜이 쌓은 이미지와 에폭시는 마치 호박 화석같이 특정 시공간을 투명하게 봉인한다. 각 박스에는 시간의 층이 공시(共時)적으로 보여지고, 박스들을 가로 세로 열에 맞춰 벽에 건다. 각자 쌓아온 시간의 이력은 모두 다르지만, 동등하게 다루어진다. 



물결속에서,2023,,mixed media,가변설치



[우연한 조각](2024) 시리즈에서 (전체가 아닌)‘조각’에는 이미 우연성이 개입돼 있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것은 마찬가지 경로를 거친 것과 만난다. 박은지는 [우연한 조각 An accidental piece](2024)에 대해 ‘조각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작용하는 상태로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작용하는 양가적인 감정과 근사하다’고 말한다. ‘물질성과 행위의 역동성을 통해 관계의 불확정성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며, 결과적으로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관계적 시간성을 반영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즉흥과 우연은 ‘시각적 무의식을 드러낸다’ 각각의 먹 드로잉에 내재된 넉넉한 여백들은 다른 층위에 존재했던 형상들이 이합집산하는 장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라는 단위 구조보다는 그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연속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존재가 산재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상관물로서 무(허공)가 존재해야 한다. 


원자론자들은 운동에 방점을 찍고 그러한 운동이 전개되는 허공을 중시했다. 원자론자들의 공간 및 운동에 대한 개념은 ‘전체는 하나이며 영원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파르메니데스)이 아니다. 안티페리스타시스, 즉 꽉 찬 공간에서 줄지어 일어나는 순간적인 대체 순환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과는 대립된다. 원자론자들은 만일 모든 것이 꽉 차 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원자들의 만남은 우연적이고 이는 자유에 대한 사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물질 입자들이 춤추는 영원한 운동하는 공간에 대한 상상이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우연과 허공에 대한 관념은 자생성과 자유의 원리와 연결된다. ‘이 세계의 형성 이전에 이미 무수한 세계들이 있었으며, 원자들은 항상 이미 마주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자론자들에게 있어서 기원, 원인, 목적에 대한 질문은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의해 폐기된다.’(장 살렘) 



수평선,2023,mixed media,116.8x910cm



[우연한 조각]에서 열을 맞춘 설치 방식은 우연의 다양한 면모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우연이 한갓된 우연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형식적 조치이다. 정사각형이라는 공유하는 틀은 움직이는 단면같다. 비슷한 조형 요소의 공간적 배열은 잠재적인 움직임을 가진다. 자세히 보면 높낮이의 차이는 있다. 크기가 같아도 무게는 다르다. 사각형이라는 공간적 형식은 통일되지만, 시간의 층위까지 통일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 [투명의 깊이](2025)에서 투명과 깊이는 결합되기 힘든 역설적 표현이지만, 그의 작품은 몇십 장이 되는 얇은 평면(종이)가 겹쳐진 것이라 깊이를 논할 수 있다. 점, 선, 면이라는 기초 조형 요소는 겹쳐져 깊이를 만든다. ‘굵기와 농도가 다양한 선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어두운 면과 점들이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리듬감과 율동을 만들고...기초조형 요소인 흑백의 점과 선으로부터 복잡한 경계에서 생성되는 공간’이 생성된다.


층들의 간격은 투명한 매체가 채우기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따름이다. 한두 장이 아니라 수십 장으로 넘어가면 무엇과 무엇이 어떻게 겹쳐질지 예상하기 힘들다. 다만 흐르는 듯한 선과 번지는 듯한 형상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온갖 다양성의 보고인 자연에도 바닥과 물속의 고기가 다 보일 정도로 맑은 호수가 있다. 박은지의 작품은 층이 핵심이다. 그것은 작가도 예측할 수 없는 조합을 만든다. 중간에 붓는 레진은 화선지와 먹(그밖에 흑연, 연필 등 주로 모노톤의 재료)의 물성을 자유롭게 퍼지게 하고 투명하게 보이게 한다. 몇 장의 드로잉이 투입되는가 얼마큼의 레진을 붓는가는 작품마다 다르다. 하지만 몇 층이 되든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동일하다. 두께와 투명성의 결합으로 두툼한 무게와 날렵함이 공존한다. 벽에 거는 작품의 경우 사각형을 유지하지만, 설치의 묘를 살리기 위해 열을 가해 변형시키기도 한다. 



우연한조각,2024,mixed media, ,27x27cm


우연한조각2,2024,mixed media, ,27x27cm



바닥에 놓고 조명을 받으면 반투명 입체 구조물의 반영상이 맺힌다. 여기에서도 조명이나 관객의 동선 등, 주변 환경을 제대로 품기 위해서는 작품 간의 간격이 중요하다. 최초의 이미지들이 중첩된 평면은 안팎의 여러 각도에서 보여진다. 작품 [wave](2024)는 여러 굴곡 면을 가진 형태들이 모여 또 다른 굴곡 면을 이루는 모습을 표현한다. 공간은 형태를 담는 것을 넘어서 그자체가 주체가 된다. 그는 이 시리즈에 대해 ‘아크릴의 텍스쳐 변형은 내면에 이는 물결(wave)로 재료의 원형을 벗어나 시간의 흐름, 의도치 않은 우연성, 필연성, 개연성’이라고 말한다. 한 관객은 이 작품에서 빙산같은 이미지를 봤다고 한다. 반투명한 그의 작품은 굳건한 산이 아니라, 떠돌며 녹기도 하고 오랜 시간 깊숙이 품어왔던 것을 밖으로 내놓기도 하는 유동성을 가진다. 설치 작품 [물결 속에서](2023) 또한 투과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성이 특징이다. 


린넨 천에 먹으로 그려 천정에서 드리운 작품들은 여러 각도로 설치되어 관객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물결 형태를 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물결 속으로 유도한다. 한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몸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시시각각 다른 장면으로 다가오는 연극적 설치 작품이다. 그것은 다른 작품처럼 평행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엇겨서 늘어뜨린 것으로, 관객의 움직임과 관련된 시간성이 중요하다. 천에 그려진 형상들 또한 한 형태로 고정되기 보다 번져 나가면서 농담의 변화를 보여주며, 마치 얼룩같은 불확실한 외곽선을 가진다. 가로 9미터가 넘는 작품 [수평선](2023)은 수평선이 가능한 탁 트인 규모를 가진다. 작가는 에폭시 작업으로 소화하기 힘든 큰 규모의 작품은 긴 나무 패널에 붙여 전시했다. 에폭시를 활용한 중첩의 효과를 살릴 수 없는 평면에는 수많은 주름과 얼룩의 형상들로 가득해 비슷한 효과를 준다. 



투명의 깊이,2025,mixed media, 22.7×15.8㎝



인접한 선들의 간격과 진하기는 모두 다르며, 여러 방향의 흐름이 산재한다. 외곽선이 불분명함에 따라 형태라기 보다는 얼룩으로 보이는 면들은 다양한 농담을 가진다. 인접한 형태들 사이의 농담 차이는 가상적 원근감을 나타낸다. 조형 어법의 관례상 어두울수록 더 깊이 있다고 가정되지만, 선들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힘의 분포는 바닥과 표면을 뒤집을 수도 있다. 복잡한 조형적 지형은 무언가를 뱉어내기도 하고 함몰시키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변화무쌍한 기후나 지형을 떠올린다. 촘촘한 관측의 시대에 이변은 더욱 많이 기록되고 파급력도 크기에 박은지의 ‘수평선’은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다. 천과 나무패널 등의 실험은 규모는 자유롭게 키울 수 있었지만, 겹침에 대한 작가의 요구가 반영되기 힘들었다. 반면 다양한 층위의 역동적인 만남은 규모를 한정시킨다. 자연에 내재 된 필연과 우연의 만남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계속 실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