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붉은 여왕(Ruddy Queen) ; 신화적 여성 또는 여성의 신화

 

통상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픽토그램에서 여성은 빨강으로 표시되지만, 색채 이론에 의하면 원래 붉은색이 여성의 상징은 아니었다. 성상화에서 성모 마리아는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십대부터 시작되는 오랜 가임기간 동안 이어지는 여성의 생리현상은 자궁이라는 소재와 맞물려 성적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성이 본질인가 아닌가에 대한 결론지어지지 못한 오랜 논쟁이 있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예술]에서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육체, 다시 말하면 의미가 각인 된 곳으로서의 육체는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지만, 육체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육체란 우리의 지성,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결코 포함될 수 없는 하나의 타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질적 육체는 전(前)문화적이며 전(前)언어적이기도 하다. 피터 부룩스는 쾌락의 감각 특히 고통의 감각은 언어 외적인 감각임을 든다. 


 황지현,  Ruddy Queen 2 붉은 여왕 2, 2024, Acrylic gouache on canvas, 130.3x97cm


‘아무리 고차적인 상징적 구조와 담론의 체계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육체적 감각으로부터 나온다’(피터 부룩스)는 사고는 몸의 재현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재현은 앎으로서 대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이 추진하는 바이다. ‘육체에 관한 글쓰기는 한편으로 육체를 의미체계 속에 포함시키려는 우리의 욕망, 그리고 한편으로는 육체가 타자일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의미의 영역 외부에 글쓰기의 피안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라는 정반대의 두 가지 경향 사이의 긴장’(피터 부룩스)이다. 황지현의 작품에는 여성의 성기를 비유하는 대상들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시각적 불투과성이 있다. [육체와 예술]에는 팜므 파탈의 특징을 가진 에밀 졸라 소설의 여자 주인공 나나의 예가 나온다. ‘나나의 성기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따라서 더욱 강력하다. 여성의 성기는 알 수 없는 무엇이며 따라서 서술적 역학의 원동력이 된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자의 나체는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당사자인 여성은 조금 낫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재현이나 상징같은 확언이 아닌, 비유와 알레고리 어법이 요구된다. ‘본질주의’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지만, 궁극적인 차이의 문제가 남아있다. 남성성도 왜곡됐는데 여성이 남성화되는 것이 대안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황지현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여성의 ‘본질적’ 특징이 여성의 특수성이 되어, 거짓된 보편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특히 그의 주된 매체인 회화가 몸이나 자연의 실재성과 교차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상징 또한 자연적 실재와 연결된 것만이 오래 기억되고 이어진다는 점에서 여성과 붉음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서, 부정을 긍정으로 전화시키는 작가의 방식은 붉음에 여왕의 권위를 부여한 점이다. 하지만 권위에는 희생 또한 따른다. <붉은 여왕>은 2024년 개인전(플레이스 막) 제목이기도 하다. 


 황지현, Island of Women 그녀들의 섬,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90.9x72.7cm


 황지현, Eve and Adam 이브와 아담,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72.7x60.6cm


작품 [붉은 여왕 1,2](2024)에서 붉은 베일을 둘러쓴 미지의 실체는 붉은 꽃이다. 그의 작품에서 암술과 수술은 제거된 상태로 꽃의 생식적 기능은 삭제된다.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도려냈다. 남성이라는 유일한 성을 기준으로 삼는 정신분석에서 거세를 떠올리는 여성의 생식기는 상처처럼 텅 빈 내부를 보인다. 베일 안의 꽃은 겹겹이 들어가야 하는 비밀스러운 존재다. 베일이 벗겨진 [붉은 여왕 2]는 땋은 머리를 한 여성으로 짐작된다. 검은 배경 속에서 빛나는 피부는 깊은 어둠과 관련된 아름다움을 예시한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자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썩은 고기 냄새를 풍기며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유인하고 함정에 빠진 개체를 잡아먹거나 번식을 위한 꽃가루를 이동시키는 동물적 꽃도 존재한다. 작품 [네펜데스의 노래](2024)에서 식충식물의 자루는 자궁처럼 보이는데, 여기에는 여성의 성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있다. 


약한 여성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은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를 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전야에 제국의 시장 및 남성성의 위기가 고조될 무렵 유행한 신비와 매력의 여자인 팜므파탈이 그 예다. 19세기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브 모로의 작품에서 ‘자비심 없는 아름다운 여성들은 연약하고 수동적인 인물들인 시인과 대조된다. 여성들은 초기 낭만주의에서의 연약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여인들이 아니라, 강력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불길한 인물들이다’(루시 스미드). 남성적 위기의식에서 나온 산물인 요부상은 여성이 당하지만 않는 강한 존재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성과 죽음을 결합시키는 ‘운명의 여인’이 대안적 여성상은 아니다. 황지현의 작품에서 강력한 여왕의 이미지가 편재하는 자궁의 이미지는 요부의 이미지와 부분적으로만 교차한다. 그가 회화와 드로잉 등 여러 작품에서 호명한 릴리스나 메두사의 예를 살펴보자.


 황지현, The Vine of Lilith 릴리스의 덩굴, 2024, Acrylic gouache on canvas, 130.3x97cm


드로잉 작품 [릴리스의 덩굴](2023)은 여성을 상징하는 달이 나타나며, [릴리스의 덩굴](2024)은 아름답고 긴 머리와 연결된 둥근 형상들이 함정같은 내부에 복잡한 구조를 접고 있다. 작품 [그녀](2025)는 여인의 머리칼이 뱀으로 변하며, [메두사의 눈](2024)에서 메두사를 본 이를 돌로 변화시킨다는 신화는 강력한 여성의 표본이다. 보여지는 대상인 여성이 볼 때의 힘은 강하지만 부정적이다. 그는 메두사를 대칭구조로 단단하게 표현하고, 상대를 해치는 대신에 단호하게 자기 갈 길 간다. 길은 인생을 비유한다. 황지현의 작품에서 그녀의 길은 혼자다. 그는 신화를 활용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와 겹치는 것을 선택한다. 직접 말하기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신화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신화적 어법은 ‘여성의 다면성을 표현한 알레고리 회화’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눈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속도를 내던 시대의 패러다임이 아직 멀쩡하게 존재하기에 ‘다면성’이란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넘어 저항적 가치일 수 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주어진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사하기를 권하는 시대에 거듭해서 읽고 해석해야 하는 ‘알레고리’ 또한 마찬가지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적 충동]에서 상징과 알레고리를 대조한다. ‘상징은 곧 본질이다. 알레고리는 낭비적이며, 잉여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다. 알레고리는 항상 과도한 상태이다...알레고리를 활용하는 작가는 이미 잊혀 졌거나 불분명하게 되어버렸을 수도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복원시키지 않는다. 알레고리는 해석학이 아니다. 그는 상실되거나 마멸될 수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인다.’(크레이그 오웬스) 황지현의 작품은 신화를 비롯한 여러 텍스트를 중첩시켜 생겨나는 알레고리 구조가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통해 읽혀지는’(크레이그 오웬스) 과정은 기호의 불완전성과 전용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기호가 완전하다면 변할 틈이 없다, 


 황지현, From Here to Somwhere 여기서부터 어딘가로, 2017, Acrylic gouache on canvas, 140x400cm


 황지현, The Road That has Not Been Ended 3  끝나지 않은 길 3, 2023, Acrylic gouache on canvas, wall painting, drawing, Rounded Flat


로버트 넬슨은 [새로운 미술사를 위한 비평용어 31]의 ‘전용(appropiation)’이라는 항목에서 신화가 전용할 수 있는 기호는 어느 정도 불완전하며 이에 따라 전용 가능하다고 본다. ‘완전하거나 가득 차 있다면 기호는 변할 수 없다. 전용은 그 자체가 지각이고, 보여진 사물에 대한 반응이며 심지어는 기억이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마음의 재구성’(로버트 넬슨)이다. 알레고리에서 시간적 과정은 필수다. 그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 오래 전부터의 일이며, 이때 신화는 인류 상상계의 보고로 호출될 수 있다. 과거에 신화는 공동체의 공유 언어였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호는 수수께끼가 된다. 일상적 대상은 유물이 되고 예술적 사물이 된다. 기호는 변형된 만큼 변화할 수 있다. 작가는 ‘미술사와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를 차용하여 원본의 이미지를 변주하고 과거만이 아닌 동시대 여성이 겪는 사건들을 화두로 올린다’고 말한다. 


황지현이 주로 선택하고 작업 소재로 활용하는 신화적 여성은 ‘릴리스, 메두사, 성모, 천사, 비너스’ 등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릴리스와 메두사는 본래 그들이 지닌 지식에 대한 탐구와 주체성이라는 특징보다 악녀로서 남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반면에 성모는 같은 여성임에도 성적 욕구를 소거 당한 존재로 여성의 순결을 신화화하였으며, 천사라는 존재 또한 부드러운 여성 이미지로, 비너스는 미의 상징으로서 고정된 이미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여성 이미지를 탐색하고 변형 및 재조합’ 함으로서 ‘신화의 의미를 확장한다’고 밝힌다. 신화는 허구일지라도 그 결과는 현실적일 수 있다. 사회의 요구가 반영된 상상이나 이데올로기처럼 말이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서 이를 현실과 픽션의 관계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리얼리티는 확실히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만, 텍스트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픽션은 그것과 구별되는 리얼리티를 설명하는 수단이고,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다 쉽게 찾아내는 도구’(퍼트리샤 워)이다. 


 황지현, Inner Sanctum 내면 성소,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60.6x50cm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오로지 미지의 사실을 통해서만 지각될 수 있다’(퍼트리샤 워)는 점이 예술을 비롯한 허구의 역할이다. 작품 [여기서부터 어딘가로](2017)는 19세기 말 유럽의 상징주의 회화에서 나타난 여인의 여러 단계를 떠올린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변화하는 여러 단계를 엮어 연결하고 있는 보랏빛 나무줄기들이다. ‘문화’인 남성에 대비되는 여성은 ‘자연’이며, 자연같이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 만약 본질이 변할 수 없다면 본질의 의미를 변화시키면 된다. 예술은 사회에 직접 작용하기는 힘들고, 단지 사회적 의미를 변화시킴으로서 현실의 변화도 기대하는 이상적 영역이다. [끝나지 않은 길3](2023)에서 모서리 부분에 설치된 평면으로부터 양옆으로 확산하는 에너지는 미지의 길이 나무가 자라듯이 꽃향기가 퍼지듯이 확산하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다. 암술과 수술이 제거된 꽃과 여성의 토르소가 있는 [오필리어](2024)에서 토르소는 지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빅토리아 시대의 인기 화가 밀레이(Millais)의 [오필리어](1852)를 비롯해서 미술사에서 많이 그려진 이 주제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죽음을 물신화한다. 통속적 비극뿐 아니라 대중 공포물 등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죽음은 절정이 이른 것이 무너져야 하듯, 판에 박힌 이야기 꺼리가 된다. 린다 하트의 [악녀]에 의하면 여성성은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여성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는 것은 결국 그녀를 죽임으로서, 따라서 그녀가 야기하는 위협을 제거함으로서 가능하다. 여성을 죽은 육체로 만든다는 것은 그녀의 수수께끼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을 제압해서, 불안정성과 유동성 자체를 명확하고 움직일 수 없는 위치로 고정시키는 것이다.’(린다 하트) 황지현 판의 오필리어는 익사에 가까운 수동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 갈길을 가는 모습이다. 그 앞길이 껌껌해도 말이다. 나르시소스처럼 물에 자신을 비춰보는 여자를 그린 [응시하다](2017)에서 그녀는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황지현, Blue Woman 1 푸른 여인 1,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53x45.5cm


 황지현, Blue Woman 2 푸른 여인 2,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53x45.5cm


나르시소스의 신화는 자기애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린다 하트에 의하면 성적 사랑은 항상 나르시시스적이었다. 즉 자신의 상상물에 매혹된 자기애였다. 한편 자신을 반영하는 듯한 짝패는 나르시시즘과 레지비어니즘을 결합시킨다. 린다 하트는 예술의 소재는 19세기에 이타적인 여성으로부터 나르시시스트 여성으로 변화된다고 지적하면서, 더이상 자기 희생적인 아닌 여성은 남성의 자아에 파괴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여성상은 이상적인 파괴자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술은 작품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응시하는 행위이며, 단순한 대면을 넘어서 내부로 몰입해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몰입 또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황지현의 작품에서 여성의 길은 내부로도 바깥으로도 향하며 식물처럼 순환한다. 400x140cm의 대작 [여기서부터 어딘가로](2017)에서 중심을 지배하는 것은 붉은색 자궁이다. 작가는 거기에 최고 권위를 나타내는 관을 씌워주었다. 


여기란 최초의 출발인 자궁이다. 여기로부터 출발하는 여러 서사들이 화면 양편으로 펼쳐진다. 악의 씨앗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원죄를 포함한다. 작품 [이브와 아담](2025)은 이브를 앞에 내세운 제목이 작가의 의도를 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많이 공유된 신화나 종교적 도상이 포함돼 있으나 변형 또한 필수다. 인류의 선조인 한 쌍은 누드보다 더 선정적인 가더벨트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을 장식해주던 후광은 꺼져버렸다. 만약에 원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브와 아담 모두에게 있다. 여성은 원죄와 관련되지만 무조건 부정할 수 없는 존재다. 여성은 남성을 포함한 모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신비롭기도 하고 불길하기도 한 여성에 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악녀 반대편의 천사를 설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천사처럼 무성적 존재이다. 작품 [여인과 아들](2024)에서 순결한 하얀 성녀가 분출하는 피같은 꽃무늬로 오염된 것은 무염수태라는 모순의 풍자로 보인다.


 황지현, Uterus Flower 자궁꽃, 2025, Acrylic gouache on canvas, 40.9x31.8cm



 

3. 내면 성소(Inner Sanctum)와 자궁꽃 (Uterus Flower); 여성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집은 전통적인 양성 분업에 의해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녀가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된다 해도 그곳은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 린다 하트는 [악녀]에서 가장 친근한 장소인 집이 공포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프로이트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익숙한 것은 친근하고 안락하고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그 반대로 이상하고 이질적이고 자꾸 머릿속을 맴돌며 위협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익숙한 것은 어떤 변형을 통해서 기괴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괴함은 이미 항상 여성성의 본질에 존재한다.’(린다 하트) 황지현은 ‘집과 안팎의 식물은 집이라는 공간의 안락함과 집 안에서 발생하는 충돌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은유’한다고 말한다. 집은 2012년 <The Lighthouse>(더케이 갤러리) 전에도 키워드로 등장한다. 파도와 길이 교차되어 이어지는 언덕 위의 이층집이 있는 [끝나지 않은 길 1](2012)(플레이스 막)은 ‘내면의 성소’이기도 하다. 


[붉은 방](2024)과 [달리는 여인](2023)에서 여성에겐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녀가 작가라면 그 안에서 달릴 것이다. 작품 [Her own room](2023) 방으로 설정된 공간인데도 경계가 확실치 않아 물이 범람한다. 빠지지 않는 생식기 도상은 방 속의 또다른 방이다. 모래시계는 그 방안에서 시간과 싸움하는 상황을 은유한다. 긴 머리 여인과 맞붙은 방은 시각적 관례상 여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무대가 된다. 작품 [마주치다](2019)에서 두 개 층의 방이 투시되는데, 식탁과 침대는 작업의 물리적 에너지원일 수 있다. 예술과 삶이 보다 밀접한 여성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자리는 없다. 어디선가 솟은 두 물머리가 하트 모양으로 만나는 [Inner Sanctum](2026)은 30x30cm의 밀집된 영역 내부에 매듭과 꽃, 날개 등이 가득 연결돼 있다. [노래하는 밤] 시리즈를 내면 성소에 포함시킨 것은 전형적인 몰입의 예이기도 한 꿈꾸기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간대를 말한다. 꿈과 비슷한 작품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환상적 단계이다. 


 황지현, Uterus Flower-Endure and Bloom 자궁꽃-견디고 피어나다, 2024, Acrylic gouache, colored pencil on canvas, 72.7x60.6cm


작품 [노래하는 밤](2022)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전경의 형상들은 뒷모습의 여인의 열정을 표현한다. [노래하는 밤2](2022)은 식물의 이파리 옆맥이 생식기이자 입으로 변하면서 합창한다. 둥근 캔버스에 그려진 [노래하는 밤](2019)에서 동물적으로 변한 이파리들이 노래한다. [노래하는 밤3](2022)에서 타원형의 부드러운 생식기 형태는 입과 눈이 된다. 곳곳에 배치된 말풍선은 일종의 묵음(默音)이다. 귀들이 모여있다면 소리가 있는 것이다. 생식기 모양이 둘러싼 성소를 그린 [Inner Sanctum-ignition](2026)은 집단적으로 발화한다. 여기로부터 사람들이 나와 각자의 길을 간다. 얇은 물 위로 항해하는 작품 [노래하는 밤-항해](2021)에서 그림은 무엇을 만날지 모를 항해와도 같음을 알려준다. 붉은 꽃과 열매로 가득한 섬은 [그녀들의 섬](2025)보호일까 고립일까. 작품 [Two women]에서 두 여성의 유대. 또는 쌍둥이 분체같은 그녀들의 결속은 풀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여성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표현된 드로잉 [그녀와 나](2023)는 사회가 그녀들을 ‘부자연스러운 관계’로 보는 것과는 달리 편안해 보인다. 그의 작품이 동성애라는 증거는 없지만, 여성주의는 일종의 자매애를 필요함도 염두에 둘 수 있다. 닮은 두 여성은 (여성인)내가 나를 탐색하는 분신일 가능성이 더 크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열매를 예시하는 것이며, 열매는 씨앗을 남긴다.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우며, 생물의 여러 단계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비약이다. 꽃은 시작과 끝을 연결한다. 푸른 여인이 온실 속 식물을 바라보는 작품 [온실](2019)은 시선을 통해 동화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여성은 식물이 되고 식물은 여성을 비유한다. 작품 [Sharing](2017)에서 푸른색 바탕과 대조를 이룬 붉은 꽃은 입을 벌린다. [Offering](2016) 시리즈는 봉헌물처럼 헌납된다. 꽃은 축하나 봉헌의 대표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붉은색 꽃은 신체 기관의 느낌이 더욱 강하다. 피부의 붉은 기운을 감돌게 하는 것은 피의 움직임이다. 자궁은 누구에게 봉헌될 것일까. 인류의 존속을 위한 재생산일까. 


 황지현, Uterus Flower-Overcome Sadness 자궁꽃- 슬픔을 이겨내다, 2023, Acrylic gouache, colored pencil on canvas, 72.7x60.6cm


황지현은 자궁의 생산력을 예술적 말하기로 전환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편재하는 자궁에 대해 ‘신체 밖으로 나온 자궁은 여성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배출, 월경과 신체적· 정신적 진통, 모성과 양육, 노화에 대한 양가적 사유를 담고 있다’고 밝히면서, ‘꽃의 암술과 수술을 제거한 자궁꽃을 창작하여 여성 역할의 전형성에 대한 자율적 선택을 제시하였다’고 말한다. 작품 속 자궁은 말과 소리로 가득하다. 작품 [Uterus Flower](2025)에서 식물 형상을 한 자궁들이 말풍선과 연결되어 여러 상황의 여러 말들이 들려온다. 작품 [Comfort of the Moon](2019)에서 말풍선이 연결된 자궁은 할 말이 많다. 둥근 캔버스 안에 부드러운 형태들이 가득한 [Listen to me](2019)에는 대화하는 말풍선이 보인다. [Uterus Flower](2023-24) 시리즈는 제목 안에 여러 상황들이 부기되면서 식물 형태의 생식기가 말하고 외친다. 이는 여러 식물에서 받는 느낌이 감정이입된 것이기도 하다. 황지현은 여성에 대한 다양한 알레고리를 활용하면서 형식주의에 말라버린 빈약한 미술의 토양을 풍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