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 : 조용한 소란
2021.4.20-10.24
@서울식물원 식물문화센터 2층 프로젝트홀 2, 마곡문화관

서울식물원을 아직 가보지 못했다는 핑계와 전시를 보자는 핑계로 작가 정정엽의 개인전을 골라 시간을 냈다.
가는 길은, 사연이 꽤 있다. 서울식물원을 흔하게 봤던 작은 화원을 떠올리며 갔던 것이 실수였다. 날도 더운데, 서울식물원이라고 괄호 안에 적힌 마곡나루역은 서울식물원 부지의 남쪽 끝으로, 북쪽 끝인 마곡문화관과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쾌청한 날씨에 큰길가로 나오는 데만도 삐질 거리는 땀을 닦아야 했다. 5시 입장 마감이라는 안내를 보고 온 터라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마곡문화관을 향해 달렸다. 택시 기사님도 모르는 마곡문화관을 가겠다고 무작정 지도를 펼쳐놓고 근처에서 내린 게 두 번째 실수였다. 마곡문화관을 가려면 입구 격인 열린 숲의 방문자센터를 지나 온실과 주제원 등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야 한다. 사방이 오픈되어 있는 공원처럼 보이지만, 입구가 사방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아 공사장 펜스로 둘러쳐진 곳들도 많이 있다. 여유가 있어서 식물문화센터부터 찬찬히 보았더라면 고생을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꽤 힘들게 도착한 마곡문화관을 앞에 두고 동행한 어머니는, '일제시대 건물같이 생겼네' 했다. 1927-28년 건립되었다는 이 곳은 '서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이란 이름이었다. 마곡 일대 평야의 물 관리가 이 건물의 역할이었다고. 현존하는 한국 근대 산업 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다고 하여 등록문화재가 되었다고 한다. 보존 가치 때문인지 바닥에 유리로 띄워, 본래 건물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인근 동네에 어릴 때부터 오래 살았던 경험으로, 이 일대가 농사를 짓는 평야였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건물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내부는 군산에서 여럿 보았던 창고들이 떠오르는 모양새였다. 바닥이 훤히 보여서 어둡게 하고 조명이 일부를 비추는 전시장으로써는...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약간 주의가 필요한 정도였다. 전시 보는 내내 조금씩 놀라곤 했으니까.

정정엽 작가의 작품은 나에게 무턱대고 좋은 작품들에 속한다. 설명이 없어도 그냥 보고 있으면 좋은. 그의 팥들은 꽤 익숙했는데, 감자와 고구마들은 생소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그릴 생각을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보다. 오기 바로 며칠 전, 이 전시의 도록을 입수했다. 설명 글에 '외계인 같기도 한' 이란 표현을 썼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감자 싹을 어쩜 이렇게 예쁘게 그렸냐고 탄성이셨다. 외계인 손같이도 보였던, 생명을 뻗대는 싹이 예쁘게 와닿는 순간이다.

(사진)싹7, 2015 / 싹6, 2015
함께 보는 이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는, 이번 전시는 그렇게 어머니의 시선으로 보게 됐다. 팥이 그려진 작품을 보곤 붉은 건 팥이고, 초록은 녹두고, 검정 건 흑팥이라고 했다. 색만 다르게 입혔다고 생각해왔던 나에겐 또 다른 시선이다.

(사진)바다2, 2019

(사진)나무 도시에서1~5, 2001

(사진)싹-풍경2, 2020 / 싹-풍경1, 2020
나방을 볼 때는 도심에서 멀어져 경기도 광주에 살았던 때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필요에 의해 늘어난 짐승들도 짐승들이었지만, 키우지 않는 곤충은 또 왜 그렇게 많았는지. 계절마다 피고 지고 자라고 스러지는 풀떼기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솔직하게도 해가 지는 그 곳은, 시컴시컴한 하늘에 별도 많고. 도심의 소음 대신 산 것들의 소음이 그득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싼 생명과 생명체를 열렬히도 체감했었다.

(사진)나방1, 2014
경기도로 작업실을 옮겼다는 작가도 그럴 거다. 감자나 고구마에 싹이 나고, 잘 다듬어져 포장되는 나물이 아니라 뭐가 뭔지 모를 만큼 여기저기 얽혀진 풀떼기들이 이런 여름날이면 사방팔방 보일 거다.

(사진)광장11, 2017
(사진)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2018
〈광장11〉을 볼 땐, '이거 그건가보네, 사람들이 휴대폰 불빛 다 켜고 광장에 서 있는 거'라고 하신다. 정말 그래 보인다. '조용한 소란'이란 제목은 사실, 알알이 그려진 이것들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이란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보니 어느 한구석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 드물다.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을 볼 때는 세삼 예술의 힘이 이런 것이었지 싶다. 텍스트로 읽을 때는 그랬었지 했던 것들이, '아이고 그랬지 그랬겠네'로 이어지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사진)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김혜순 시), 2017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김혜순 시)〉는 사진과 작품의 차이를 느끼게 해줬다. 도록에서 사진으로 봤을 땐 커다란 줄 알았는데 너무 작아서 그랬다. 어릴 때 집에 있었던 어머니의 경대가 이런 모양이었는데. 어머니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는지, '세상에 이런 경대를 어디서 가져다 놨지' 하신다.
삶과 죽음에 관해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으레, 씨앗을 당연히 시작의 위치에 놓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가 아니던가. 흐르고 흐르는, 돌고 도는, 물과 같이 또 흐르고 또 지나가겠지. 흐르는 중간 어드매를 살고 있는 내 위치가 새삼 느껴지는 날이다.
(참고)
서울식물원 전시안내
https://botanicpark.seoul.go.kr/front/lookaround/exhibit_view13.do
사진.글.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