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며 개인의 삶과 사회적 인식을 형성해 온 시각문화의 역할을 탐구하고자 〈한국 근대 시각문화 특강: 근대, 시각문화로 읽다〉을 기획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사회가 시각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구성됨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가 사유와 사회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에 단순한 미술사적 지식의 전달을 넘어, 시각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비판적이고 입체적으로 독해하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주제 1] 사진으로 보는 근대 (권행가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1강]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찍다: 사진관 문화의 도래와 초상사진

2025년 10월 20일 월요일

 

이번 강연에서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한국 근대기에 수용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또한 그것이 당대의 사회 및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시각문화를 창출한 양상을 고찰하였다. 먼저 본 강연은 사진술의 기원을 니엡스와 다게르의 발명 등 유럽 사진의 기술적 연원에서부터 살피며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후 1880년대 한반도에 사진 기술이 도입되던 초창기의 역사를 조명하였다. 특히 김용원을 중심으로 한 사진술 습득과 촬영국 개설 등은 외래 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던 초기의 시도로 평가되나, 1884년 갑신정변이라는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그 흐름이 정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공백기에 근대 조약 체결 이후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사진사들이 사진관 문화를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재조선 일본인 사진사은 단순히 상업 사진관을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 및 외교 관련 시각 정보를 생산하는 보도 사진 기자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사진첩과 엽서 등 관련 상품을 유통하였다. 나아가 사진회와 공모전을 조직하고 아마추어 사진가를 후원하는 등, 당대 사진 기술의 도입과 문화 전반을 주도하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나 이와타 카나에(岩田鼎) 등이 촬영한 초상사진들은, 오늘날 작가명이 대중적으로 인지되지 못한 채 교과서를 통해 유통될 정도로 근대 한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시각 자료로 자리 잡았음을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1910년대를 전후하여 김규진의 천연당 사진관 개설 등을 기점으로 한국인이 다시 사진 문화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현상과 함께, 사진과 전통 초상화가 만나 형성한 새로운 시각문화의 지형을 분석하였다. 이 시기 초상사진은 기존의 초상화를 대체하는 동시에, 역으로 초상화 제작을 위한 참조 자료로 활용되는 복합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사진의 도입은 단순한 기술적 이식을 넘어, 기존의 시각 질서를 재편하고 새로운 문화적 실천을 탄생시키는 동력이었음을 본 강연은 심도 있게 조명하였다.

 

 

[2강] 여행지에서 사진엽서를 사다: 근대 관광사진엽서로 보는 시각문화사

2025년 10월 27일 월요일

 

이번 강연은 근대 관광 사진 엽서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가 구성되고 유포되는 방식을 고찰하였다. 먼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우편 제도와 전쟁을 계기로 탄생한 사진엽서의 기원을 살피고, 1900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사진엽서의 전성기가 카메라 보급과 통신 기술 발달로 쇠퇴하기까지의 과정을 개괄하였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일본은 1920-30년대에 러일전쟁 기념 엽서 수집 붐을 기점으로 사진엽서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엽서는 디자인, 사진, 인쇄 기술이 결합된 총체적 매체로서 취미 수집, 상품 광고, 국가 선전 등 다층적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관광용 풍속 사진 엽서는 이후 조선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한국에서 사진엽서의 시작은 1900년대 초반 알레베크(Charles Aleveque)가 제작한 조선 풍속 사진엽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러일전쟁의 승리로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 관광 붐을 배경으로, 일한서방(日韓書房),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 다이쇼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와 같은 일본계 출판 자본이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백 종의 명소 및 풍속 사진을 이용해 사진첩, 그림엽서 등을 대량으로 제작하고 판매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엽서는 시리즈로 구성되어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특정 소재를 전형화, 계열화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특히 기생, 옛 궁궐과 같은 전근대적인 모습과 경성역,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본정 거리와 같은 근대적 식민 시설을 병치하거나 대비시키는 구도를 통해, 정체되고 이국적인 구(舊)조선과 발전하고 문명화된 신(新)조선이라는 이분법적 식민지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이 강연에서는 사진엽서가 단순한 기념품이나 통신 수단을 넘어, 기술, 자본, 관광 그리고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특정 시각 질서를 구축하고 전파한 매체였음이 확인되었다.

 

 


[3강] 포토몽타주, 사진화보로 세상을 읽다: 대중매체 사진의 대중 활용법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이번 강연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태동한 포토몽타주와 전위적 사진 기법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동아시아에 수용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대중매체 안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활용되었는지를 추적하여 시각 매체의 사회적 함의를 고찰하였다. 논의의 출발점은 1920년대 전후 러시아에서 전개된 구축주의(Constructivism)와 생산주의(Productivism)였다. 타틀린, 로드첸코 등을 중심으로 한 구축주의는 ‘재료가 형태를 만든다’는 이념 아래 회화의 관조적 기능을 탈피하고, 붓 대신 컴퍼스와 자와 같은 기계적 도구를 사용하여 예술과 생산의 통합을 시도한 급진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험실과 전시장에 머무른다는 비판 속에서, 생산주의는 예술을 실제 삶과 사회주의 혁명에 복무시키는 실천적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진, 특히 포토몽타주는 단편적 현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창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혁명적 예술의 도구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전위적 사진 실험은 새로운 시공간 개념과 역동성을 표현하는 매체로서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에서는 이것이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신흥사진(新興寫眞)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었다. 이 시기 자유미술협회전에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가 정립한 용어인 ‘포토 플라스틱’이 참가 부문으로 설정된 것은, 이 기법이 단순한 기술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본 강연에서 주목하고자 한 지점은 이 전위적 시각 언어가 1940년대 전시 체제 하의 일본에서 어떻게 전유되고 변용되었는가이다. 《매신사진순보(毎新写真旬報)》와 같은 당시의 사진 화보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고무신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나 전쟁의 풍경을 담은 보도사진들은 하나같이 로우앵글, 하이앵글, 극단적 클로즈업 등 과거 유럽 아방가르드와 신흥사진이 탐구했던 전위적 구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이는 급진적 미학이 국가 총력전을 위한 생산의 독려와 전쟁 현실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선전, 선동의 도구로 전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시각 형식이 대중을 동원하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재활용된 것이다. 이러한 포토몽타주의 여정은 하나의 시각 양식이, 그것이 수용되는 사회의 정치적 조건에 따라 어떻게 그 의미와 기능이 변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4강] 포토몽타주, 사진화보로 세상을 읽다: 대중매체 사진의 대중 활용법

2025년 11월 10일 월요일

 

이번 강연은 근대미술사에서 ‘남성의 몸’ 재현 문제를 이쾌대의 작품과 미술해부학 노트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해부학적 지식의 수용이 당대 사회의 신체 담론과 결합하여 어떠한 시각적 결과물로 구현되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본 강연은 19세기 유럽의 미술해부학이 마티아스 뒤발(Mathias Duval)과 폴 리체(Paul Richer)로부터 일본의 도쿄미술학교와 제국미술학교로 이식되는 지식의 계보를 추적하였다. 구메 게이치로(久米桂一郞)를 거쳐 니시다 마사아키(西田正秋)로 이어진 일본의 미술해부학은 ‘인체의 미적 효과를 연구하는 인체미학’으로 정의되었으며, 이러한 교육을 이쾌대가 직접 수학했음을 확인하였다. 이 지식 체계가 이쾌대에게 수용되고 깊이 내면화된 것은 그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오직 기억에 의존해 집필한 『미술해부학 노트』를 통해 증명된다. 이 노트는 단순한 근골격 지식을 넘어, ‘안면각’ 이론과 같이 인종과 진화를 서열화하는 19세기 서구의 유형학 및 골상학적 잔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의 미술 교육이 순수한 미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계적으로 분류하던 제국주의적 시선과 분리될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이쾌대의 <군상> 연작에 등장하는 근육질의 남성 누드는 해부학적 지식의 정확한 구현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작품은 식민지 현실 극복을 위해 신체 단련과 국민 보건을 강조했던 이여성, 여운형 등의 지식인들이 동참한 국민의 몸 만들기 담론과 공명한다. 캔버스 위에 구현된 이상적이고 강건한 남성의 신체는 비록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억압된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던 시대적 열망과 건강한 국민상(國民像)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