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며 개인의 삶과 사회적 인식을 형성해 온 시각문화의 역할을 탐구하고자 〈한국 근대 시각문화 특강: 근대, 시각문화로 읽다〉을 기획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현대사회가 시각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구성됨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가 사유와 사회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에 단순한 미술사적 지식의 전달을 넘어, 시각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비판적이고 입체적으로 독해하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주제 3] 근대 시각문화의 첫 경험 (목수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1강] 국가가 시각 이미지의 옷을 입다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이번 강연은 태극기라는 국가 상징물이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탄생하고 그 의미가 변화해 온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 정체성을 표현하는 시각 상징물의 채택이 근대 국가 수립의 보편적 현상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태극기가 단순한 표식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상징물을 규명하였다. 태극기의 제정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라는 대외적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기점으로, 군함과 상선에 국적을 표시하고 외교 공관에 게양하는 등 태극기는 국제 사회에 조선이 독립적인 주권 국가임을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시각적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후 태극기의 역할은 대외적 표상을 넘어 대내적인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확장되었다. 관청과 학교에 상시 게양되고, 우표, 훈장, 화폐 등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함께 그 도안이 널리 확산되면서, 태극기는 국민 모두가 공경해야 할 공동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추상적인 국가 개념을 구체적인 시각 이미지로 전환하여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려던 근대 국가의 보편적 기획과 맥을 같이한다. 한편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동안 억압된 민족의 저항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 비밀리에 제작하여 손에 들었던 태극기는 식민 통치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도 가시적인 저항의 표식이었다. 이 저항의 상징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되었고, 마침내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통해 주권 국가의 공식 국기로 재탄생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외교적 필요에 의해 탄생하여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기능하다, 국난기에는 저항의 깃발로 변모하며 민족의 운명과 의미를 함께 해온 역사를 담고 있다.
[2강] 1890-1910년 인쇄매체를 통한 시각문화 경험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이번 강연은 1890년대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신문과 교과서 등 근대적 인쇄 매체의 등장이 한국인의 시각적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고 확장시켰는지를 고찰하였다. 이 시기는 문자 중심의 전통적 지식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복제 가능한 시각 이미지가 대중적 소통과 계몽의 핵심 도구로 부상한 전환기였다. 논의의 출발점은 『한성순보』(1883)가 창간호에 <세계전도>를 수록하여 세계에 대한 지평을 확장한 것이었다. 이는 폐쇄된 세계관을 넘어 외부 세계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인식하게 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한편 신문에서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대중의 일상에 파고들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은 광고와 시사만화의 등장을 통해서였다. 『독립신문』(1896)에 실린 광고 이미지들은 이미지가 가진 힘, 즉 자본과 결합하여 대중의 이목을 끄는 힘이 인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였다. 이러한 시각적 소통의 잠재력은 『대한민보』(1909)에서 함께 정치적, 사회적 비판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창간호부터 1면에 연재된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당대의 정치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 사회 부조리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의 언어였다. 신문 1면 중앙이라는 파격적인 지면 배치는 이 만화가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시대 의식을 담론화하고 민중의 울분을 대변하는 핵심적인 발언의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국민소학독본』(1895)과 같은 근대 교과서에 이미지가 도입된 것은 시각적 계몽이 국가의 공교육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근대적 지식과 가치관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이미지의 영향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근대기의 인쇄 매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욕망을 조직하고, 비판적 여론을 형성하며,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다층적인 시각 문화의 장이었다.
[3강] 박람회와 박물관이라는 시각문화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유물이나 작품을 관람하는 시각문화 경험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유물을 박물관에서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번 강연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강연에서는 근대기 한국에서 박물관과 미술 전람회가 도입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사물과 예술 작품을 공적인 공간에서 관람하는 새로운 시각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강연에서는 첫째, 박물관 제도의 수용과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근대적 박물관 인식은 1880년대 조사시찰단과 보빙사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박물관 및 박람회를 견문하며 시작되었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만국박람회를 ‘지척의 땅에서 천만 리를 여행하는 경험’으로 묘사했듯, 이는 세계의 문물을 한 공간에 집약하여 전시하는 근대적 시각 질서와의 첫 조우였다. 이러한 외부적 자극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공예품과 전통문화를 세계에 보이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조선에서 박물관 제도의 정착은 1909년 제실박물관과 1915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설립에서 이루어졌다. 제실박물관(이왕가박물관)에는 구매한 도자기, 금속 공예품, 회화, 불상 등이 전시되었고 이 목록은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으로 발간되었다. 한편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구입에 의존했던 이왕가박물관과 달리 광범위한 행정력을 동원하여 유물을 수집했다. 이때 수집된 조선 각처의 불교 미술품은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며 예배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감상 대상이 되었다. 동시대 미술 작품을 위한 전시 공간의 발달은 또 다른 축을 형성했다. 초기에는 서화협회 전람회와 같이 전람회가 학교 강당이나 신문사 강당 등 비전문적 공간에서 주로 개최되었으나,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의 시작과 함께 점차 제도화된 전시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미쓰코시나 화신백화점의 화랑, 카페가 새로운 전시 공간으로 부상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는 덕수궁 석조전과 총독부 미술관 등이 전문 전시장으로 활용되며 근대적 미술 전시 인프라가 구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