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가볍게, 기꺼이 삭아가는 것들에 대하여
MMCA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제안하는 생태적 겸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를 1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이 전시는 불후(不朽)라는 단어에 갇혀 있던 미술관이 스스로 빗장을 풀었다고 보여진다. 영구 보존이라는 근대 미술관의 신화를 뒤로하고, 기꺼이 썩고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길 자처하는 작품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 서막: 실패와 재생의 한 끗 차이
전시는 이은재의 취약한 붓질로 시작된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려나가는 행위로 첫 단추가 끼워진다. 맞은편 아사드 라자의 〈흡수〉는 미술관을 거대한 경작지로 바꾼다. 폐기물로 만든 비옥한 토양을 관람객에게 나누어주는 이 행위는, 예술이 독점적 소유물이 아닌 공동체의 토대임을 증명한다.

이은재, 이제 근대 모서시를 닦아라-서문, 2023 ⓒ안효례

아사드 라자, 흡수, 2026 ⓒ안효례

■ 되어가는 시간: 무상함 속에 핀 윤리적 춤
파트 2 '되어가는 시간'은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숨 쉰다. 이은경의 안료가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변성하고, 여다함의 뜨개 조각 위로 향 연기가 춤을 출 때, 관객은 소멸이 결코 허망한 끝이 아님을 목격한다.

특히 유코 모리의 〈분해〉는 인상적이다. 썩어가는 과일의 에너지가 빛과 소리로 변환되는 순간, '취약함'은 '생명력'으로 치환된다. 델시 모렐로스와 김방주가 보여주는 흙의 심연과 폐자재의 온기는 죽음과 삶이 사실 한 몸이었음을 나직이 읊조린다. 여기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물질 스스로가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이은경, 소멸의 빛, 2025-2026 ⓒ안효례

유코 모리, 분해, 2026 ⓒ안효례

델시 모렐로스, 엘 오스쿠로 데 아바호, 2023 ⓒ안효례

김방주, 벌목과 불, 2026 ⓒ안효례

■ 막간: 미술관의 심장에서 일어나는 '전환'
전시의 백미는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이 조성한 '전시마당'에서 펼쳐진다.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곳에서 고사리의 〈초사람〉과 김주리의 〈물 산〉은 비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형태를 잃어간다.

■ 함께 만드는 풍경: '소유'에서 '돌봄'으로
마지막 파트는 예술의 권위를 내려놓는 작업들로 채워졌다. 댄 리의 작품 속 곰팡이와 곤충은 인간 작가와 동등한 '공동 저자'가 된다. 다음은 에드가 칼렐의 작업이다. 테이트 모던이 이 작품의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가 되기로 한 결정은 이번 전시가 던지는 가장 묵직한 메시지다. 조상의 지혜를 소유할 수 없듯, 예술 역시 소장의 대상이 아닌 돌봄의 대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사회적 발효'와 미래 재료×그린 레시피 랩의 실험은 우리 삶으로 확장한다. 예술 활동과 미술 재료의 미래는 우리 삶의 문제들과도 닿아있다.

에드가 칼렐,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안효례

미래 재료×그린레시피랩의 실험: (좌)장미, 염녀, 2026 (우)문서진, 종이 연구: 죽은 식물의 몸, 2021-2025 ⓒ안효례

흙을 밟는 휠체어, 점자로 읽는 소멸: 모두의 '삭는 미술'
문턱을 낮춘 미술관, 예술의 공공성을 다시 쓰다
한 편 전시가 관객에게 건네는 다정함도 목격했다. 전시실 곳곳에는 작품의 재료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촉지도'와 바닥의 '안내 유도선'이 배치되어 있다. 시각장애인 관람객은 손끝으로 작품의 물성을 읽고, 점자 캡션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소멸의 미학에 가 닿는다. 이 전시가 제안하는 가장 파격적인 가이드는 이것이다. '필요한 경우 소리를 내거나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미술관에서, 다양한 방식의 감상을 '환영'한다는 선언이다.

결국 '삭는 미술'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편견을 삭히는 과정으로 보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비인간이 같은 흙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소멸을 이야기하는 풍경. 에드가 칼렐의 작품이 '소유'가 아닌 '돌봄'의 대상이 되었듯,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관객을 어떻게 '돌보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안효례

전시정보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6. 1. 30 -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