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미 관장


예향 남원의 예술적 연원에서 백령도의 평화 비전까지
이승미 행촌미술관 관장의 예술적 연원은 예향의 정취가 깊은 전라북도 남원이다. 광한루 근처 약국집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탐독하며 성장했다. 유치원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그를 사로잡은 것은 실기보다 ‘미술사(美術史)’였다. 미술을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조망하고 작품의 사회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눈을 기르던 이 시기는 훗날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될 ‘큐레이터’로서의 사상적 기초를 다지는 자양분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사립미술관을 설립하겠다는 어떤 인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30년 전 ‘제비울미술관’의 초대 학예실장으로 부임하며 학예연구사의 길로 들어섰다. 척박했던 사립미술관의 출범을 현장에서 지탱하며 전시기획 실무와 미술관 제도에 대한 실전 감각을 체득했다.



행촌미술관에서, 2026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 관장은 공공미술관의 사회적 사명에 주목했다. 당시 과천관 1층의 유휴 공간에 제도권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허무는 파격적인 전시인 《한국만화 100년》전을 기획했다. 대중문화로 취급받던 만화를 최고 미술관 중심부에 진입시킨 이 전시는 미술계에 적잖은 파장을 던졌다.
이 성공은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미술관 개관으로 이어졌다. 당시 공공미술관의 ‘미술관 교육’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 관장은 교통이 불편한 과천관의 취약함을 정면 돌파할 카드로 ‘어린이와 교육’을 제시했다. 어린이들이 미술관을 친숙한 놀이터로 인식하게 만든다면 지속 가능성이 보장될 것이라 확신했다.

개관 초기 우려를 딛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기획력을 인정받아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개관 준비에도 참여했다. 이후 어린이미술관을 과천관 1층 전면에 안착시키며 미술관이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도록 사력을 다했다. 오늘날 국내 공공 뮤지엄에서 어린이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이 당연한 상식이 된 배경에는 이승미 관장의 선구적인 시도에서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2011년 인천아트플랫폼 관장으로 취임한 이 관장은 시각예술을 통해 분단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는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다. 바로 《인천 평화미술프로젝트》다. 그는 안전한 전시장 공간을 거부하고 서해 NLL을 지나 최북단 섬 백령도로 작가들과 함께 들어갔다. 접경 지역 곳곳의 방공호와 방치된 구 백령병원을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철조망 위에 예술가들이 만든 장미꽃을 매달아 평화의 메시지를 구현하고, 상흔 가득한 병원 건물을 치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군사적 충돌 우려 속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큰 주목을 받으며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현장을 찾기도 했다. 이 관장은 “큐레이터란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고립되게 만드는 존재이며,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에서 평화를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한다.



2023 신안 암태도 서용선미술관 기획 중에,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참여작가와 함께
(가운데 서용선 작가와 이승미 관장)



예술의 땅끝에서 수묵의 푸른 비전을 쏘다
2014년 이승미 관장은 전라남도 해남에 내려와 행촌문화재단 설립을 주도하고 ‘행촌미술관’을 개관했다. 이어 임하도에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스튜디오인 ‘이마도작업실’을 열었다. 해남에서 보낸 12년은 큐레이터 활동 총량보다 더 많은 일을 몰입하여 펼친 시기였다. 그는 해남에서 200여 회의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120여 명의 국내외 예술가 창작을 지원했다. 행촌미술관이 누구나 쾌적하게 예술을 향유 할 수 있는 현대적인 관람 환경을 완수하도록 공간을 마련했고,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안착에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이마도 창작레지던스’는 그의 핵심 사업이다. 참여 작가들은 매일 치열하게 작업하며 각자 수백 점의 드로잉을 쏟아냈고, 이는 작가들의 예술 세계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 관장은 단순히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가들의 작업을 아카이빙하여 현재까지 24명 작가의 도록을 출판했다. 이를 발판 삼아 작가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하며 동시대 미술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미술관의 초석부터 인천 평화미술프로젝트, 
그리고 남도 수묵의 세계화와 해남 행촌미술관의 도약까지



이 관장의 기획력은 전라남도 전체의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 대표적 결실인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1억 원을 씨앗으로 시작됐다. 이 관장은 시작부터 공무원들과 함께 미술계와 지역을 설득하고 의견을 모으며 큐레이터로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해왔다.
2018년 공식 출범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전통 회화의 중심을 ‘수묵’으로 다시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한·중·일 전통 회화를 ‘수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묶어 아시아 전통 회화를 관통하는 고유명사를 선점하는 역할을 했다. 이 관장은 수묵이 박제된 전통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 현대미술이자 K-ART로서 세계화할 것이라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2026년 5월 8일, 행촌미술관은 해남읍 해남종합병원 뒤편 언덕에 신축된 단독 건물로 이전하고 성대한 재개관식을 가졌다. 이번 이전 개관은 이 관장이 해남에서 일구어낸 시간의 집약이자, 재단의 모태가 된 고(故) 행촌 김제현 박사(1926-2000)의 100년의 삶이 남긴 문화적 결과물이다. 의사였던 김제현 박사의 유산인 서화, 도자기, 차 도구 등을 품은 행촌문화재단에서, 이 관장은 오늘도 소장품의 학예적 가치를 정리하며 미술관의 완전한 자립과 지속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이승미 관장은 스스로를 ‘천상 큐레이터’라 명명한다.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작가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모든 프로젝트를 사랑한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오늘도 땅끝 해남에서 전 세계를 향해 수묵의 푸른 비전을 쏘아 올리고 있다.


- 이승미(李承美, 1961- )
전북 남원 출생.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목포대 대학원 예술경영 박사과정 수료. 행촌문화재단 대표이사 및 행촌미술관장, 신안군 예술감독(저녁노을미술관장), 인천아트플랫폼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교육팀장) 역임.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총괄·수석 큐레이터 및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 총감독으로 활동하며 300여 건의 전시를 기획함.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2회), 전남도지사 표창, 한국박물관협회 표창 등 수상. 저서로 『이마도 그 바람이 말을 걸 때』, 『예술이 꽃피는 이마도작업실』, 『그림 문학을 그리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