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로운 작가들이 미술계에 진입하지만, 그 이름이 시장과 제도 안에 남는 일은 드물다. 예술경제학자 마그누스 레슈(Magnus RESCH, 1984- )가 2018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는 이 현실을 숫자로 보여준다. 143개국, 약 50만 명 작가의 36년치 전시·경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작가의 경력 궤도는 첫 5회 전시를 어디서 치렀는가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됐다. 수준 높은 기관에서 경력을 쌓은 작가가 다시 좋은 기관으로 이동할 확률은 무작위 선택보다 42배 높았다. 낮은 궤도에서 출발해 중심부로 올라선 작가는 50만 명 중 240명, 단 0.05%였다.

정말 낮은 확률이다. 이 0.05%에 속한 작가들은 어떻게 경력을 쌓아 올렸을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초기부터 한 종류의 공간에 안주하지 않고 성격이 다른 여러 기관을 두루 거치며 전시 이력의 폭 자체를 넓혔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 중심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진입에는 재능뿐 아니라 ‘경로의 설계’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젊은 작가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는 핵심 요인



그렇다면 지금 한국 미술시장의 문을 쥔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에서 발간하는 <아트마켓 2026>에서는 2026년 국내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비평가 등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어떤 작가와 작품이 시장과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중간자들인 게이트키퍼 7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다. 해당 설문에서 젊은 작가의 글로벌 성공 조건 가운데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인 항목은 ‘서구 미술과 차별화되는 한국적 서사 또는 독자적 조형 언어’(65.7%)였다. 이어 ‘글로벌 메가 갤러리와의 전속 계약 및 프로모션’(54.3%)이 뒤를 이었고, 비엔날레 참여 같은‘제도권 검증’은 34.3%, ‘소셜 미디어 화제성’은 21.4%에 그쳤다. 우선순위는 드러난다. 독자적 언어가 출발점이고, 갤러리와 제도 네트워크는 그 언어를 국제적 경력으로 전환한다. 미디어 노출은 이를 증폭하는 후속 변수에 가깝다.

문제는 실행이다. 명성 있는 갤러리의 전속이나 주요 미술관의 초대는 작가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열기 위한 경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 초기 전시 이력의 폭을 넓혀라. 신생·비영리 공간, 지역·대학 미술관, 공모형 기획전처럼 성격이 다른 무대와의 접점을 늘리는 것이다. 도약한 작가들에게는 이력의 다양성과 네트워크 중심부에 닿는 연결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둘째, 심사로 열리는 관문을 공략하라. 국공립 창작스튜디오와 해외 레지던시의 오픈콜은 작가가 직접 해외 활동을 타진할 수 있는 대표적 경로다. 뉴욕 아만트(Amant) 등 연구 중심 기관의 이력과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이 맞물린 임영주의 행보가 그 실례다. 공신력 있는 공모·수상 제도 역시 비평적 승인으로 향하는, 직접 두드릴 수 있는 문이다. 물론 이러한 공모 및 선정 제도에서 이름을 알리기 전 작가의 꾸준한 전시와 이력 관리가 중요하다. 다만 이력은 넓히되 작업의 질문은 선명해야 한다.

셋째, 전통 경로 밖의 영토를 살펴라. 언리얼 엔진으로 가상 생태계를 빚는 이은조는 구글 아트 앤 컬처 같은 기술 플랫폼과 협업해, 갤러리가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새로운 관객을 직접 개척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다. 게이트키퍼들이 성장의 조건으로 꼽은 해외 기관 전시, 국제 네트워크, 독자적 언어는 하나같이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다. 첫 5회의 전시는 궤도를 만들지만, 그 궤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은 결국 어디에도 없는 자기만의 질문이다. 0.05%의 문은 여전히 좁다. 데이터는 그 문을 대신 열어주지 않지만, 어떤 선택이 다음 선택의 가능성을 넓히는지는 보여준다. 시장이 묻는 것은 얼마나 빠르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느냐다. 그 깊이를 향한 첫걸음을 어디에 두느냐 - 모든 것은 결국 거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