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작가 고경화의 개인전 《존재의 시간》이 지난 2025년 6월 19일부터 7월 7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제주갤러리에서 열렸다. 2025 제주갤러리 공모 선정 작가로 초청된 고경화는 회화, 목판화, 설치, 영상 등 30여 점을 선보이며 제주의 기억을 기록하는 다매체 작업을 선보였다.

고경화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오랜 시간 제주 4·3 유적지와 잃어버린 마을, 중산간 숲을 답사해왔다. 현장에 남은 역사·생태·신화적 요소들을 채집해 이를 회화와 판화, 설치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샤먼적 수행에 가까운 작업”이라 표현하며, 예술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기억과 치유의 의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존재의 시간–종남마을〉,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162.2cm
대표작 중 하나인 〈존재의 시간–종남마을〉은 1948년 초토화 작전으로 사라진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마을을 다룬다. 돌담과 대나무 숲, 우물 등 현장의 잔재를 기록한 뒤, 진녹색 바탕 위에 흰 선으로 중첩해 남겨진 흔적과 사라진 기억을 동시에 포착했다. 화면은 전경과 후경의 구분 없이, 보이는 장소와 보이지 않는 기억이 겹쳐지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고경화의 작품은 “기억을 채집하는 예술적 수행”의 일환이다. 단순한 장소 재현을 넘어 현장에서 수집한 흔적을 공감각적으로 전환하며,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는 ‘채집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 세부) 〈존재의 시간-상가리 천년폭낭-일어서는 땅〉,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112.1cm
특히 ‘바람 바람’ 시리즈에서는 소멸 목판 기법을 활용해 거친 질감 속에 역사와 자연의 시간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이는 제주의 땅에 뿌리내린 이야기이면서도, 환경 변화와 역사적 상흔을 겪은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소멸 목판 기법은 전통 목판화와는 달리 하나의 목판을 여러 번 사용하면서, 인쇄할 때마다 판을 조금씩 더 새기거나 깎아내어 이미지가 점차 달라지고, 최종적으로는 판이 소멸하는 방식의 판화 제작 기법이다.

고경화의 화면은 시적인 정서를 품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존재의 시간–뿌리내리기〉 같은 작품은 상실과 위로, 기억과 치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 이는 이승과 저승, 현실과 비가시적 세계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제주갤러리는 이번 전시에 대해 “개인의 체험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결국 보편적 공감과 치유로 확장된다”며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거닐며 사라진 존재와 흔적을 마주하고, 그것이 불러오는 감정의 물결 속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