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경사진 골목을 따라가면 낮고 단정한 회색 담장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은 ‘물방울 화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1929-2021)이 30여 년 동안 생활하고 작업했던 집이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5년만에 이 자택과 작업실은 2026년 5월, ‘종로구립김창열화가의집’이라는 이름의 공공문화시설로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대지면적 638.3㎡, 약 193평 규모다.


우물을 연상시키는 중정의 구조물

김창열화가의집은 새롭게 건립된 기념관이 아니다. 김창열이 직접 집의 구상에 참여하고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해 1988년 완공한 실제 주택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가족과 생활하는 동시에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작품을 제작했다. 건물은 역사·예술·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서울시 우수건축자산 제13호로 등록됐다. 



이처럼 이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건축 그 자체이다. 지상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관람객을 위한 휴게공간이 마련돼 있고, 지하에는 아카이브실과 김창열이 실제 사용했던 작업실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돼 있다.


실내에서 바라본 중정의 구조물,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평창동의 가파른 지형을 활용한 건물은 대문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도록 설계됐다. 한옥의 마당과 우물을 연상시키는 중정, 자연광이 측면에서 은은하게 들어오는 지하 작업실, 정원과 실내가 순환하듯 이어지는 동선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실에서 물방울 그림을 감상한 뒤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면, 작품이 결과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오랜 노동과 생활에서 나온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Z자 구조의 내부는 작가의 서재를 지나면 작업실로 들어설 수 있다.

작업실에는 작가가 사용했던 이젤과 캔버스, 화구, 서적과 각종 작업 도구가 남아 있다. 오래된 물감과 종이, 가구가 놓인 공간은 정돈된 화이트큐브 전시장과는 다른 밀도를 지닌다. 



이곳에서는 김창열이 어떤 빛 아래서 그림을 바라보고,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캔버스를 마주했을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개관기념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은 이 집의 장소성에 주목해 김창열의 한지와 종이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전시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제작된 회화와 판화, 드로잉 등 23점을 통해 물방울 이미지가 재료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전시 기간은 2026년 5월 29일부터 8월 23일까지다.


지폐와 초대장에 그려진 〈물방울〉 시리즈, 1990-2000년대

평창동 작업실은 한지가 잘 마를 만큼 볕이 좋은 곳이었다. 김창열은 이곳에서 한지와 문자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작업을 지속했다. 거친 마포나 캔버스에 맺힌 초기 물방울이 사물의 실재와 환영 사이를 오갔다면, 한지 위의 물방울은 종이의 섬유와 번짐, 동양적 시간성을 끌어안는다.


김창열, 〈물방울〉, 1970년대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뒤 1950년대 후반 정창섭, 박서보 등과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며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뉴욕을 거쳐 1969년 파리에 정착했고, 1972년 〈밤에 일어난 일〉을 통해 물방울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흔히 순수함이나 명상, 정화의 상징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과 죽음, 이산과 이방인의 경험이 놓여 있다. 물방울은 상처를 덮는 눈물인 동시에, 기억을 지우고 비우기 위해 평생 반복한 수행의 흔적에 가깝다. 작가는 하나의 물방울을 무수히 반복해 그리면서 개인적인 고통을 보편적인 이미지로 전환했다.


1980년대 이후 화면에 천자문이 등장하면서 물방울은 더욱 복합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어린 시절 조부에게 배웠던 한자와 서예의 기억이 화면으로 돌아왔고, 김창열은 이 연작을 ‘회귀’라 명명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형식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형성한 문화와 기억의 근원으로 향하는 회귀였다.

‘작가의 집’이 남기는 질문
최근 여러 지역에서 작가의 옛집과 작업실을 미술관이나 기념공간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살았던 집을 보존한다는 것이 가구와 물건을 그대로 진열하는 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공간에서 어떤 작품이 탄생했는지, 작가의 일상과 창작이 어떻게 연결돼 있었는지를 지속해서 연구하고 전시해야 비로소 장소의 의미가 살아난다.



김창열화가의집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출발점에 서 있다. 종로구는 유족에게 기증받은 작품 390점을 포함해 2,600여 점의 자료를 기반으로 앞으로 전시와 아카이브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동시에, 그 작품이 태어난 시간과 장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