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에서 박현주 작가의 특별기획전 《빛의 현존 Light’s Presence》를 보았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작품 한 점 한 점 안에 차오른 찬란한 빛이었다.


박현주:빛의 현존 Light’s Presence》
영은미술관 제1전시장
2026.6.20-9.6

특히 영은미술관 제1전시장의 높은 천장 아래 놓인 박현주의 작품들은 내게 조금은 현대적인 ‘제단화’처럼 보였다. 종교적인 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빛과 깊은 청색, 붉은색의 화면, 그리고 빛을 머금었다가 다시 내보내는 듯한 물성에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종교적 아우라가 있었다.



박현주는 오랫동안 빛과 색, 물질의 관계를 탐구해 온 작가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이후 금박을 사용한 반입체 〈Inner Light〉, 〈Light Monad〉 연작부터 최근의 평면회화 〈빛그림 Into Light〉까지 그 흐름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그의 작업을 보며 흥미로웠던 것은 ‘빛’이 단순히 화면에 묘사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박은 실제 전시장의 빛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반사하고, 안료와 템페라가 여러 층 쌓인 화면에서는 빛이 표면 위에 있기보다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스며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의 배경에는 꽤 고전적인 회화의 기억도 있다. 박현주는 도쿄예술대학에서 템페라화 모사 작업을 경험하면서 프라 안젤리코와 금박 템페라의 세계를 접했고, 이후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미 2014년 영은미술관에서 열린 《빛을 쌓다_accumulated Light》에서도 금박과 빛의 중첩은 중요한 작업의 언어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전시에서는 ‘빛을 그린다’기보다 빛이 머무를 장소를 만드는 회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최근의 〈빛그림 Into Light〉 연작은 물감과 안료를 반복적으로 축적하며 만들어진다. 한 번의 몸짓으로 완성되는 화면이 아니라 시간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깊이가 된다. 실제로 이 연작은 박현주 작가가 2021년 이후 영은미술관 레지던시에서 작업하며 발전시켜 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작품들이 영은미술관의 높고 넓은 전시장에 펼쳐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회화와 건축 사이에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겨난다. 작품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색면이 벽에 걸려 있다기보다 벽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와 공간을 점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장면에서 문득 방혜자 선생의 작품을 떠올렸다.

영은미술관은 2019년 방혜자의 기획전 《빛에서 빛으로》를 열었다. 당시 전시에는 회화와 조각, 설치뿐 아니라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을 위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빛의 탄생〉과 관련된 작업도 소개되었다. 평생 빛을 생명과 사랑의 차원에서 탐구했던 방혜자의 작업이 이 공간에 놓였던 기억과 지금 박현주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풍경 사이에는 물론 서로 다른 미학과 세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빛을 하나의 물리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정신적인 감각으로 끌어올리는 태도, 그리고 영은미술관 특유의 공간이 그것을 받아내는 방식에서는 묘한 공명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를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영은미술관이라는 미술관의 시간이다.

영은미술관은 고(故) 이준영 이사장이 한국 현대미술의 창작 환경을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마련한 대유문화재단을 모태로 2000년 문을 열었다. 설립 당시부터 전시장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머물며 작업할 수 있는 창작스튜디오를 미술관의 중요한 한 축으로 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박선주 관장이 미술관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2000년에 시작된 영은창작스튜디오는 벌써 25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왔다. 국내외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입주작가 전시, 오픈스튜디오, 워크숍과 학술행사, 교육과 교류 프로그램을 지속해 왔다. 박현주 작가와 영은미술관의 관계 역시 바로 이 긴 시간 안에 있다.

작가는 이미 2014년 영은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로 이곳에서 《빛을 쌓다》를 선보였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영은미술관의 큰 전시장에서 《빛의 현존》을 펼치고 있고, 그 사이 새롭게 만들어진 〈빛그림〉 역시 다시 이곳의 레지던시에서 태어났다.



한 미술관과 한 작가가 한 번의 전시로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시작된 관계가 십여 년에 걸쳐 새로운 작품과 전시로 이어지는 것. 어쩌면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미술관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결과 중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작가가 긴 시간 쌓아온 빛과
그 시간을 오래 지켜봐 온 한 미술관.

두 행보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