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 발 프로덕션(PRODUCTION PIEDS-JOINTS)은 2026년 10월 2일 오전에 '멀리뛰기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여성 미술작가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의 제작 발표회를 열었다. 발표회는 백지숙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진행했다. 행사는 백지숙 대표의 프로젝트 소개로 시작해 시즌1 첫 작품인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의 도입부 일부를 상영, 이어진 소감과 작품 설명,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백지숙 대표


모은 발 프로덕션은 '발을 맞춰 세상을 담다'라는 부제 아래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영화·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이를 출판과 전시 등 다른 매체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 폐관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 인사미술공간에서 2000년대 중반 각각 프로젝트 디렉터와 매니저로 협업했던 두 사람이 설립했다. 당시 인사미술공간이 벌였던 아카이브 사업과 미디어아트 확산기에 화이트큐브를 넘어 극장 상영까지 포함하는 유통·배급을 시도했던 사업을 지금의 프로덕션이 계승하는 '타임캡슐' 같은 작업으로 소개됐다. 

첫 프로젝트인 '멀리뛰기 프로젝트'는 전시장 보조 자료로 소비되던 작가 소개 영상이나, 사후 위인화에 그치는 다큐멘터리의 단순 홍보 기능을 넘어 다큐시리즈(docuseries)로 영화 프로덕션을 브랜딩하고자 한다. 에피소드별로 다큐멘터리 감독뿐 아니라 극영화 감독, 드라마 감독, 미술작가가 작가의 특성에 맞춰 각기 연출을 맡으며, 제작 초기부터 아카이벌 PD 체제를 두어 자료 추적과 저작권 관리 체계를 함께 구축하고 이를 후속 콘텐츠 개발로 이어가고자 한다.

시즌1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은 1953년 정전협정 이전에 태어난 여성 미술작가의 생애와 작업을 30~40대 젊은 세대 영화인·미술가의 시선으로 조망한다. 김윤신, 김명희, 노원희, 윤석남 네 작가를 각각 다루며, 다큐멘터리·출판·전시 등 여러 채널로 이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선보인다. 

첫 주인공 김윤신의 삶을 다룬 임선애 감독의 장편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 Kim Yun Shin Punches In〉(90분)는 2027년 정식 개봉에 앞서, 10월 열리는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다. 김윤신 작가는 임선애 감독과 함께 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을 예정이며, 미술계 작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영화는 10월 9일과 10일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가 이어지며 11일에도 상영된다.

백지숙 대표는 소개에서 프로젝트의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그녀는 공공기관, 특히 미술관 안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진행하며 종종 그 벽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영화·영상을 넘어 출판과 전시, 웹툰과 그래픽노블까지 매체를 확장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 미술의 새로운 관객층과 접점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미술관 방문이 영화관 관람 패턴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미술계 인사들을 만나면 영화 이야기로 끝나던 자리가 요즘은 거꾸로 영화인들이 미술 이야기를 많이 하는 자리로 뒤집혔다는 점도 짚었다. 작가의 창작 윤리와 작품 평가를 더 이상 분리할 수 없게 된 시대적 변화, 미술 애호가의 관심이 대가의 작품(마스터피스) 중심에서 작가 개인을 향한 팬심으로 옮겨가는 흐름 속에서, 20세기형 '천재 마초 아티스트' 서사를 대신할 새로운 작가상이 가능할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네 작가를 선정한 기준에 대해서는, 애초 작고한 작가부터 다루려 했으나 생존 작가의 육성을 직접 듣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권진규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준비하며, 문화예술계 인사들조차 권진규를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랐던 경험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도 전했다. 전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 영화라는 매체에 주목하게 됐고, 이후 명필름이 제작한 권진규 다큐멘터리를 지켜보며 아카이브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으면 작고한 작가의 영화를 만드는 일이 요원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정전협정 이전 출생이라는 기준을 둔 것은 전쟁을 겪은 특별한 세대이고 지금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들을 중심에 놓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만 라인업을 꾸리는 과정에서 참여를 고사한 작가도, 아직 때가 아니라고 거절한 작가도, 어렵게 설득해 참여를 이끌어낸 작가도 있었다며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전했다.

김윤신 작가. 사진: 전명은. 제공: 오운


영화 제목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는 임선애 감독이 직접 정한 것으로, 김윤신이 미술관에 박제되거나 미술사 속으로 밀려들어 갈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다만 일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백지숙 대표는 임선애 감독이 아르헨티나 현지 촬영을 떠났을 당시 나이가 김윤신이 처음 이민을 떠났을 때의 나이, 그리고 권근영 기자가 김윤신 평전을 집필한 나이와 똑같이 49세였다는 우연도 전하며, 이 영화가 여성 창작자들이 공유하는 어떤 의식을 작가 자신에게도 되비추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구순의 나이에도 매일 창작을 이어가는 작가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일상을 밀착해서 담아내며, 특히 수양딸이자 오랜 동료인 김란을 비롯한 여성들의 연대가 작가의 삶과 작업을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지탱해왔는지를 포착한다고 소개했다.


도입부 일부 장면


이어진 15분가량의 미편집 영상에서는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 작가가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겪은 참상과, 피난 중 만난 한 주민이 '오래 살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건넨 개명 권유에 따라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일화를 직접 구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작가가 캔버스에 천을 덧대 쌓아 올리는 독특한 회화 기법을 직접 시연하며 19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이주 이후 한동안 손을 놓았던 회화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고, 세관에서 작품을 의심해 포장을 모두 뜯어낸 일화도 소개됐다. 영상 말미에는 1983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40여 년을 김윤신 작가와 함께 지내며 미술관 운영까지 함께해 온 수양딸 김란이 직접 등장해, 당시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던 아르헨티나 사회의 분위기와 자신이 그곳에 정착하게 된 개인사를 들려줬다.

매체 확장 계획도 함께 소개됐다. 48분 분량으로 편집된 〈김윤신: 숨 쉬듯 쉼 없이〉는 EBS를 통해 2027년 방송될 예정이며, 안그라픽스와 함께 기획한 '기억총서' 시리즈 첫 책 『김윤신, 전기톱을 든 여인』은 지난 6월 출간됐다. 전국광 조각가와 양화선 조각가의 딸이자 사진작가인 전명은이 김윤신의 작업 오브제를 촬영한 사진 연작도 별도 전시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양화선 작가가 과거 김윤신의 전주여중 제자였다는 인연도 함께 소개됐다. 시즌1의 나머지 작품에 대해서는, 김명희 작가를 다룬 장우진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후반 작업 단계에 있으며 내년 공개를 목표로 하고, 노원희 작가 다큐멘터리는 미술가 그룹 이끼바위쿠르르가 연출을 맡아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윤석남 작가 편은 이미 다른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한 편 나온 바 있어, 이번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키워 온 유기견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르게 접근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