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미술관은 2026년 10월 28일 오전 11시,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사랑노동아시아하기》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는 전승보 관장과 전시를 공동 기획한 이채영·유채린 학예연구사와 참여 작가들이 참석했다. 전시는 10월 29일부터 2027년 2월 14일까지 열린다.

유채린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전시 투어가 먼저 진행됐고, 이후 1층 세미나실에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투어 중에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직접 작업에 관해 설명했다. 본 전시에는 아시아 8개 지역에서 활동하는 14팀의 작가가 참여한다. 김영은, 노원희, 리에코 시가, 마르코스 쿠에, 바구스 판데가, 야광, 왕 투오, 이끼바위쿠르르, 장보윤, 추 하오 페이, 케이 이마즈, 투안 앤드류 응우옌, 호 루이 안, 히라 나비가 신작을 포함한 영상·설치·사진·회화·퍼포먼스 등 약 30점을 선보인다.
《사랑노동아시아하기》는 아시아를 지리적 경계나 문화적 동질성의 단위가 아니라 서구적 근대성과 자본, 국가권력이 특정한 신체와 토지에 충돌하며 남긴 흔적의 집합으로 읽는다. 이 전시에서는 식민주의의 경로를 따라 이동한 물자와 사람, 개발이 재편한 지형, 기록에서 지워진 이름이 각각 하나의 항목으로 놓인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의 구조 아래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시각은 미술관이 놓인 장소에서 출발한다. 100개국 이상에서 온 이주민이 거주하는 경기도에서 아시아는 개념이 아니라 일상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전시 제목은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서 따왔다. 아시아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을 빌려, 아시아를 하나의 정체성이나 지리적 경계로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행되는 것으로 놓았다는 설명이다.
유채린 학예연구사는 이 전시는 이채영 학예연구사와 오랜 대화를 거쳐 기획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아시아’라는 주제가 왜 경기도에 필요한지 고민했으며, 경기도가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산업, 노동, 생산이 겹쳐 온 곳이자 지금은 이주의 과정이 반영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답을 찾았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이를 추상적인 키워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신체와 땅에 새겨진 흔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았다. 제목의 '사랑'과 '노동'은 사람들이 역사적 조건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담은 말이라고 했다.
마르코스 쿠에, 〈버려짐〉, 2025, 재활용 PET 실을 이용한 산업 직조, 목재, 로프, 모래 주머니, 가변설치
작품 앞에서 설명 중인 마르코스 쿠에 작가.
투어는 마르코스 쿠에의 작업에서 시작됐다.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현재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쿠에는 중국에 있던 조부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해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가족사를 언급하며, 입구의 대형 작업을 전쟁과 난민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난민의 처지를 겹쳐 본 작업이다. 그 뒤편 벽에는 〈희망과 두려움〉이 걸려 있고, 옆에서는 〈사랑, 노동, 외로움〉의 산업용 자수기가 실제로 작동한다. 작가는 전 세계 직물의 상당량이 소각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는 점에 착안했다. 끝없는 노동으로 만든 자수와 텍스타일이 소비자의 손에 닿지 못한 채 불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벽에 걸린 작품의 윤곽이 불에 그을린 것도 이 때문이다. 유채린 학예사는 이 작업이 끝없이 일하면서도 다음으로 나아가는 회복력을 이야기하며, 전시에 힘든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지만, 회복과 희망의 이야기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장보윤, 〈블랙베일〉전시 전경.
장보윤 작가는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을 다룬다. 〈블랙베일〉은 5점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작가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독일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쓴 편지를 엽서 형태로 재구성하고, 배우가 낭독하는 방식으로 선보인다. 작가는 집단적 서사와 역사의 비극, 권력이 이행하며 만든 제도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과 함께, 이주라는 개념이 과거 세대부터 이어져 왔고 지금은 자본과 사랑이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히라 나비, 〈땅의 경계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 2019,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0분 33초.
히라 나비의 작업은 파키스탄 가다니의 선박 해체장을 배경으로 한다. 가다니는 세계적인 선박 해체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한국에서 제작돼 물자를 운송하던 컨테이너 선박이 수명을 다하면 이곳으로 옮겨져 해체된다. 선박이 생산·운송되는 경로와 해체되는 경로는 서로 다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던 산업 공간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위험과 환경 부담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호 루이 안, 〈선의 세계〉, 2025,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45분.
이어 호 루이 안의 영상 작품은 재생 시간이 1시간 45분에 이른다. 작가는 홍콩 방직 산업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이 상하이에 세운 공장, 19세기 말 맨체스터에서 아시아로 수입된 방직기, 한국이 맡은 역할이 이어져 하나의 글로벌 역사를 이룬다고 말했다.
이끼바위쿠르르, 〈비스듬한 집〉, 202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0분.
노원희, 〈비스듬한 집〉, 2002,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16.5×91cm.
이끼바위쿠르르는 70대 후반에 접어든 노원희 작가를 기록한 영상 신작을 선보였다. 이끼바위쿠르르의 조지은 작가는 노원희가 노동과 계급, 소시민의 삶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림을 그려 온 작가라고 설명했다. 성공과 유명세와는 거리가 먼 '그림은 내 일이니까 그린다'는 태도가 효율을 앞세우는 지금 사회와 정반대에 놓여 있어 이번 전시와 잘 맞다고 전했다.
추 하오 페이, 〈나시고렝 외교 #3〉 앞에서 설명 중이다.
추 하오 페이의 〈나시고렝 외교 #3〉는 참여형 작업이다. 작가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나시고랭을 대접하며 외교를 풀어 갔다는 표현인 '나시고랭 외교'에서 출발해, 지도자 간의 외교가 아니라 시민 간의 외교를 보여주고자 했다. 외교부 회의장에서 볼 법한 테이블을 설치하고, 작가 자신과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친구들이 각자의 나시고랭 레시피를 만들며 나눈 대화를 네 개의 영상에 담았다. 같은 쌀 문화권이어도 조리법이 표준화돼 있지 않아 서로 배우는 점이 많았고, 쌀을 직접 재배하지 않는 싱가포르에서는 쌀을 포장지로만 접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작가는 싱가포르에서 모은 쌀 포장지를 작품 상단에 설치했다. 미술관은 안산 인근 주민들에게서 나시고랭 레시피를 받고 있으며, 개막일에는 '입맛은 나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쌀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열린다.
야광, 〈침입자〉, 2024/2026, 4K,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LED 조명, 라텍스, 산화철, 15분 28초, 43×230×7
야광은 죽은 선비의 손톱을 먹은 쥐가 선비로 둔갑해 그의 삶을 차지한다는 설화를 죽음이나 복제, 질병에 대한 금기로 해석했다. 작가들은 주거 공간의 문제와 몸 또한 하나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경기도미술관의 제작 지원으로 영상 속 조각을 확장해 의자 형태의 설치도 선보였다.
리에코 시가, 〈카나리〉, 2007-2008, 일부.
리에코 시가는 일본과 호주, 싱가포르의 레지던시에서 각 지역 주민 수백 명에게 자신이 느끼는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물었다. 응답을 지도 위에 표시해 선으로 이은 뒤 그 선을 따라 직접 걸으며 만난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중 하나로 일본의 해안 마을에서 고래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작가는 고래의 무게만큼 바닷물을 퍼 올려 공중에 띄운 장면을 연출했다. 또 다른 작업에서는 폐광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를 탄광의 카나리아에 빗대 작품 제목을 붙였다.
왕 투오, 〈두 번째 심문〉, 2022-2023, 2파트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4K, 파트1: 2채널 비디오, 24분 28초, 파트2: 단채널 비디오, 30분
왕 투오의 영상 작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젊은 예술가와 검열관이 등장해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 체제를 두고 30분가량 대화한다. 두 사람은 1989년 중국 《현대예술전》에서 일어난 퍼포먼스 사건을 재현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결국 젊은 예술가가 이를 재현하는 데 성공하며 검열관도 함께 참여한다. 작품은 양쪽에서 볼 수 있게 설치돼 입장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드러낸다. 2부에는 다른 인물에게 검열자로 지목됐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예술가와, 1989년 그 퍼포먼스를 실제로 행한 인물이 음성으로만 등장해 국가 체제 아래에서 역사적 저항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는지 이야기한다.
투안 앤드류 응우옌은 필리핀 바탄 지역을 배경으로 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였고 베트남전 이후에는 대규모 난민 수용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영상에는 인류가 멸종한 뒤 해안 마을에 남은 다섯 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보트피플이라 부르며 어머니의 말에 따라 떠나보내고 싶은 물건을 나무로 복제해 불태우는 의식을 치르고, 해변에서 발견한 조각상의 머리와 대화를 나눈다.
바구스 판데가는 세계 최대 니켈 매장국 인도네시아에서 전기차 배터리 소재로 쓰이는 니켈 채굴 현장을 다룬다. 친환경 기술이라 불리는 전기차의 재료를 캐는 과정에서 산림 파괴와 원주민 삶의 파괴, 홍수와 산사태가 일어나는 아이러니를 함께 짚었다. 작품에는 실제 채굴 현장에서 가져온 니켈이 쓰인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광물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여섯 개의 원형 틀을 거쳐 여섯 개의 뮤직박스로 나뉘어 전달된다. 뮤직박스는 멸종 위기 수종의 나무로 만들었고, 중앙의 식물에 꽂은 핀이 식물의 신호를 받아 컨베이어 벨트와 연동된다.
마지막으로 케이 이마즈의 회화다. 작품은 인도네시아 설화 속 코코넛의 여신 하이누웰레를 다룬다. 땅의 물건을 만지면 귀한 것으로 변하는 재능을 가진 소녀가 마을 사람들의 질투로 살해돼 땅에 묻히고 그 자리에서 식물이 자라난다는 이야기다.
이후 질의응답을 시작하기 전, 전승보 관장은 전시 개최 의미를 설명했다. 이 주제를 3년 전부터 내부에서 논의해 왔다고 밝혔다. 부임 직후 미술관 앞 산책로에서 아시아 각국의 국기와 문화를 소개한 구조물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안산, 특히 단원구가 한국에서 해외 이주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서울 도심을 제외하면 일반 시민의 눈에 잘 띄지 않아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이들이 없으면 농촌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다. 관장은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랑노동아시아하기》는 미술관이 지난해 상반기 기후위기 전시에 이어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두 번째 전시이며, 관람객 상당수가 안산 주민인 만큼 지역 주민들이 이웃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승보 관장, 이채영 학예사, 유채린 학예사와 참여 작가들이 질의응답에 참석했다.
질의응답
Q. 아시아를 주제로 이주민 작가들을 모시면서 어떤 점에 주목했는지 전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전시에 영상 매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의도한 것인지, 이유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A. (이채영) 아시아학이라는 주제의 방향을 잡으며 아시아가 공통으로 지닌 역사, 곧 식민지의 기억과 전쟁, 이주 노동, 그 안에서 일어난 자본의 거대한 이동을 먼저 연구했다. 아시아 작가들이 이 주제를 예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3~4개월간 집중적으로 리서치했고, 아시아 비엔날레 리서치 투어도 거치며 작가를 한 명씩 발굴해 전체 주제로 분석했다. 키워드 하나로 묶기보다 역사에서 생태까지 아우르며 동시대 아시아가 다뤄야 할 여러 의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작가들을 선정하려 했다. 영상이 많은 것은 작가 다수가 영상 매체를 즐겨 쓰고, 역사적 내용이 영상 형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산상 운송에 제한이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Q. 아시아를 명사나 지정학적 개념이 아니라 동사로 바라봐 달라고 했는데, 어떤 뜻에서 나온 말인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
A. (이채영) 전시 제목의 '아시아하기'라는 말 자체가 동사형인데 이 설명은 김혜순 시인으로부터 빌려왔다. 유채린 학예사와 아시아라는 개념을 논의하다가 아시아를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공통의 역사가 남긴 수탈과 자본 같은 것들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읽었는데, 시인이 그동안 수동적이고 피해자로 남았던 아시아의 역사를 능동의 역사로 전환하자는 의지를 계속 표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수탈과 지배, 자본 이동, 전쟁의 역사를 지닌 아시아를 이제는 더 주체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존재로 바라봐야 하고, 여자짐승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소수자들이 이를 극복하며 연대해야 한다는 시적 선언에 공감했다. 시인에게 연락해 제목 사용 허락도 받았다.
Q. 노동과 아시아는 이해가 되는데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또 작가님들이 안산이라는 동네를 보며 느낀 점도 듣고 싶다.
A. (이채영) 아시아의 아픔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공공 미술관의 전시를 통해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지에 대한 제안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의 아름다운 작업 너머에 노동에 대한 감정과, 삶과의 교감, 타인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두었다. 전시 초입에 놓인 마르코스 쿠에의 자수기 작업 〈사랑, 노동, 외로움〉이 제목에 큰 영감을 줬다.
A. (추 하오 페이) 내일 개막일에 안산의 아시아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워크숍을 연다. 안산에 와서 다문화 거리에 가 봤는데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식당 등 음식의 다양성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본 안산은 먹거리가 밀집한 지역뿐이라 다른 곳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워크숍에서 준비하는 음식에 커뮤니티가 참여하길 바라지만, 이주 커뮤니티가 외부와의 교류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다.
A. (마르코스 쿠에) 소셜미디어에서는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 거리에서는 그들을 많이 보지 못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느라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자수기가 브랜드 로고를 새기지만, 그 뒤에서 일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입는 옷과 쓰는 커튼, 쿠션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이 보이지 않는 노동이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주제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면 이런 은유가 안산만큼 잘 들어맞지 않았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