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김윤신(1935- ) 작가에 대한 열풍이 심상치 않다. 가히 ‘김윤신 신드롬’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그러나 한국 나이로 92세에 맞이한 최근의 광영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만큼 그녀는 오랜 세월을 남성작가들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전(3.17-6.28)은 따라서 2024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초대에 이어 김윤신의 작가적 역량과 저력을 만천하에 알린 쾌거라 할 수 있다.
호암미술관의 김윤신 초대전 개최가 지닌 또 하나의 큰 의미는 이 땅의 여성작가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힘을 준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호암미술관이 지닌 유무형의 상징자본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다. 특히 어느덧 92세의 고령에 이른 김윤신이 여성으로써 각고의 고생과 삶의 신산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여서 그 범본(範本)의 빛이 더 빛난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 2013–16> 2013, 알가로보 135×202×56cm © 김윤신
작가 김윤신의 삶이 실로 그러하였다. 모든 게 척박하기만 했던 1959년에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녀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전공, 이후 조각과 회화, 판화를 통합해서 작업하는 기초를 닦았다.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이 세 요소는 김윤신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일찍이 그녀가 70년대 이후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합이합일(合二合一) 분이분일(分二分一)’로 명제화한 것처럼, 작업의 일관된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동양 전통철학의 바탕인 음과 양의 상징이거니와, 조각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양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가령, 나무라는 하나의 주어진 재료에 대한 작가의 직관과 영감에서 시작하여(合二) ‘신성한’ 땀의 노동(이것이 김윤신의 작업이 ‘신성한’ 이유이다!)을 거쳐 하나의 작품(合一)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품된 많은 수의 조각품이 채색조각인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그것은 회화인가? 조각인가? 회화 조각인가?, 아니면 입체 회화인가? 김윤신은 이처럼 예술의 경계를 여유롭게 타고 넘으면서 조형예술의 통상적인 장르를 해체하는 실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 어느덧 망백(望百)을 바라보는 노경에 이른 김윤신의 예술가적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옛것에 멈추지 않고 일일우일신(一日又一新), 즉 날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 빛나는 정신에 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김윤신의 일관된 예술정신에서 나오며, 그것은 김윤신의 작업에 생명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그 새로움은 이번 전시장을 꽉 채운 회화와 판화의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양태를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들, 가령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 추상, 남미의 자연에 뿌리를 둔 색감의 반구상적 내지는 추상화적 경향에 분산돼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전시 전경
호암미술관의 김윤신 초대전 개최가 지닌 또 하나의 큰 의미는 이 땅의 여성작가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힘을 준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호암미술관이 지닌 유무형의 상징자본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다. 특히 어느덧 92세의 고령에 이른 김윤신이 여성으로써 각고의 고생과 삶의 신산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여서 그 범본(範本)의 빛이 더 빛난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 2013–16> 2013, 알가로보 135×202×56cm © 김윤신Courtesy the artist, Lehmann Maupin, and Kukje Gallery
Photo by Studio Kukla
Photo by Studio Kukla
작가 김윤신의 삶이 실로 그러하였다. 모든 게 척박하기만 했던 1959년에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녀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전공, 이후 조각과 회화, 판화를 통합해서 작업하는 기초를 닦았다.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이 세 요소는 김윤신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일찍이 그녀가 70년대 이후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합이합일(合二合一) 분이분일(分二分一)’로 명제화한 것처럼, 작업의 일관된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동양 전통철학의 바탕인 음과 양의 상징이거니와, 조각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양태에 대한 작가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가령, 나무라는 하나의 주어진 재료에 대한 작가의 직관과 영감에서 시작하여(合二) ‘신성한’ 땀의 노동(이것이 김윤신의 작업이 ‘신성한’ 이유이다!)을 거쳐 하나의 작품(合一)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품된 많은 수의 조각품이 채색조각인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그것은 회화인가? 조각인가? 회화 조각인가?, 아니면 입체 회화인가? 김윤신은 이처럼 예술의 경계를 여유롭게 타고 넘으면서 조형예술의 통상적인 장르를 해체하는 실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 어느덧 망백(望百)을 바라보는 노경에 이른 김윤신의 예술가적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옛것에 멈추지 않고 일일우일신(一日又一新), 즉 날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 빛나는 정신에 있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김윤신의 일관된 예술정신에서 나오며, 그것은 김윤신의 작업에 생명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그 새로움은 이번 전시장을 꽉 채운 회화와 판화의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양태를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들, 가령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 추상, 남미의 자연에 뿌리를 둔 색감의 반구상적 내지는 추상화적 경향에 분산돼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전시 전경
전기톱을 들고 거대한 통나무를 자르는, 난무하는 톱밥의 분진 속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조각가 김윤신의 모습은 이제 강렬한 그녀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그 용감하면서도 사뭇 도전적으로 보이는 자태는 굳이 페미니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웅적 여성서사에 값한다. 약간 익살을 허용한다면, 난무하는 톱밥의 분진 속 김윤신의 이미지는 ‘전기톱을 든 여전사’, 곧 ‘근육질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에 필적하는 당찬 모습이다. 그 앞에 무한한 영광이 있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