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안상수
고충환 | 미술평론가


날개와 왕치 혹은 한큐 혹은 소소 혹은 지족거사 혹은 진자 혹은 뒤죽박죽 혹은 아침에 힘 혹은 천둥 치는 이 밤에, 그리고 등등. 


왜 날개인가.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은 명동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박제된 천재인가. 댄디인가. 모더니스트인가. 날고 싶은 욕망과 날 수 없는 현실이 충돌하는가. 박제된 천재가 꺾인 날개를 증명하는가. 아마도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왜 왕치 혹은 한큐 혹은 소소 혹은 지족거사 혹은 진자 혹은 뒤죽박죽 혹은 아침에 힘 혹은 천둥 치는 이 밤에, 그리고 등등인가(이하 왕치로 줄여서 표기). 왜 이렇게 긴가. 아마도 그 길이는 앞으로도 추가되면서 더 길어질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을 상징하고 주체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날개라는 이름과 긴 이름은 그저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표명과도 같고, 창작 주체로서 세상을 향한 태도와 입장을 선언한 것과도 같다. 그 속에 태도와 입장을 함축한 삶의 고치와도 같고, 그로부터 창작이 발아하고 추수되는 씨앗과도 같다. 

자크 라캉은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처에 있다. 질 들뢰즈는 주체란 그저 주체라고 부르는 막연한 습관이라고 했다.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수 없는 허명(실체가 없는 이름, 그러므로 다만 이름뿐인)이라고 했다. 선불교와 선문답에서 나는 강이 되고, 강에 부는 바람이 되고, 바람이 흔드는 수초가 되고, 강에 이는 물결이 되고, 강 위에 떠가는 구름이 된다. 나는 강(어쩌면 생각의 강)을 따라 흐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무엇이 되고, 시시각각 맞닥트리는 무엇이 된다. 바로, 되는 주체다(질 들뢰즈의 주체 되기). 주체란 되는 것이지, 이미 주어진 전제(와 전제들의 총체)가 아니다. 

주체도 의미고, 정체성도 의미다. 상황과 만나기 전 의미는 텅 비어있다. 상황과 만날 때 의미는 비로소 의미로서 채워진다. 후기구조주의는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의미는 상황 결정적이다. 다시, 그러므로 매번 상황을 옮겨 다니는(매번 다른 상황에 맞닥트리는) 나는 그렇게 다른 상황 속에서 매번 다른 주체로서 다시 태어난다. 강도 흐르고, 세상도 흐르고, 나도 흐르고, 주체도 흐른다(그리고 어쩌면 예술도, 예술에 대한 정의도, 예술에 대한 실천 논리도). 그렇게 흐르는 주체, 부유하는 주체, 정처 없는 주체, 떠도는 주체로서 나는 때로 날개가 되고, 왕치가 된다. 그리고 무언가가 될 것이다. 


날개는 타이포그래피스트다. 문자조형주의자다. 줄여서 문자주의자다. 문자주의지만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해석 대신, 즉자적인, 문자적인,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읽기를 지향하는 해석학에서의 문자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문자와 글꼴, 기호와 의미(론)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숨은 뜻을 발굴하고 의미의 바깥(모리스 블랑쇼)을 모색하는 전방위적 실천주의자의 면모에 가깝다. 개념미술 이후 현대미술은 의미를 다투는 장이 되었다. 글꼴과 의미(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실천 논리는 이처럼 달라진 장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이 고대 그리스어의 첫 글자 알파와 한글의 끝 글자 히읗이다. 왜 알파고 히읗인가. 알파와 히읗의 조합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가. 흔히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라는 말이 있다. 서양이 문명의 시작을 열고 끝을 닫는다는 의미다(원래, 시작과 끝이 신에게 있다는 의미의, 기독교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서양 중심으로 동양을 재단하고(사실상 동양을 배제하고) 문명 세계를 재단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가장 나중 언어인 한글의 끝 글자 히읗을 매개로 비록 서양이 문명을 열었지만(사실은 이마저도 편견이지만), 동양이 그 끝을 닫는다는 의미에서 옥시덴탈리즘을 대질시킨다. 단순한 문화적 자존을 넘어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지평 융합이 있고, 문명 세계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거대 담론이 있다. 문자를 매개로 한 작가의 스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다. 

그 스케일에서 묻어온 것이 한글 도깨비다. 주지하다시피 도깨비는 있고 없다. 있으면서 없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불투명하다. 의식이 그렇고, 생각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즉에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부재,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불투명한 것들 그러므로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은 예술과도 관련이 깊다. 폴 클레는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며, 가시적인 것은 다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가시화를 돕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한글 도깨비가 그렇다. 한글 도깨비는 의식이고, 생각이고, 마음이고, 유령이다. 

그리고 요셉 보이스의 사회 조각에서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움직이는(홀리는) 작동원리(그 자체 주술이라고 해도 좋을)다. 사람들의 의식을 움직이는 작동원리가 한글 도깨비라고 한다면, 그 도구가 히읗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히읗을 매개로 콜라주를 하고, 손 드로잉을 하고, 기계 드로잉(무의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초현실주의자처럼, 기계가 자동기술적(아니면, 기계적?)으로 드로잉을 하는)을 한다. 

작가의 작업은 한글 도깨비를 작동원리 삼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한 판 굿판이 있다. 주술적인(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굿판이라고 해도 좋고, 음악가 이한주와 협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연주회(합주)라고 해도 좋고, 미술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퍼포먼스라고 해도 좋다. 사실, 인류 최초의 예술은 주술에서 왔다. 노래와 춤 그러므로 가무를 통해 신을 달래고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제의에서 왔다는 점에서 주술로 사람을 홀리는데 바탕 한 작가의 작업은 예술 기원론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작가의 작업은 장소 특정성이 강하다. 전시할 때마다 그 장소만의 특수성을 살피는 편이다. 이번에는 어떤가. 전시장이 있는 심학산은 원래 구봉산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유학자 구봉 송익필이 거처했던 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노래와 춤(소리)이 어우러진 신디사이징 굿판으로 그를 부르는, 그의 정신을 부르는(되새기는), 초혼의식을 치른 것이다. 

굿판을 보면, 실꾸리에서 풀려나온 실이 저절로 기타의 현을 치는 소리, 붓으로 공중에서 먹물을 떨구는 과정에서 먹물이 종이 바닥에 닿으면서 나는 소리, 펜이, 연필이, 그리고 붓이 종이 바닥에 스칠 때(드로잉할 때) 나는 소리와 같은, 이질적인 소리, 어쩌면 불협화의 소리, 우연한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증폭기를 통해 증폭된 소리를 들려주는 사운드아트다(참고로 존 케이지의 환경음파에서는 자연음, 일상음, 채집음과 함께 우연음이 결정적인데, 케이지에게 우연음은 선 사상에서 왔다). 그리고 여기에 사전에 없는(그러므로 계획되지 않은) 돌발변수가 한 요소로서 도입되는데, 퍼포머 성능경이 라이터의 불로 팽팽한 실을 끊어 소리를 협화하고 불협화한 것이다. 사전에 없던 행동(행위)이란 점에서, 계획할 수 없는 삶, 우연한 삶의 메타포(아니면, 알레고리)로도 보인다. 혹, 이처럼 진지한 야단법석에서 실제로 고인을, 고인의 혼을, 고인의 정신을 만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는 나를 지워줘, 라는 주문을 영문자 글꼴을 써 설치했다. 인터넷이 필수인 시대에, 소셜네트워크가 기왕의 인간관계를 재편하고 대체하는 시대에,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새로운 인간관계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고독하지 않기 위해, 너나없이 분초를 다투면서, 실시간으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가상현실에 사진을 올리고, 신상을 올리고,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올리고, 자기 고백을 올렸다. 그렇게 가상현실에 사람들의 사진이, 신상이, 사생활이, 낯뜨거운 고백이 넘쳐나게 되었다. 숨을 곳이 없는 세상에, 고독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 낱낱이 까발려진 세상에, 발가벗겨진 세상에 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가상현실에서 나를 지워달라는, 삭제해달라는, 제발 잊어달라는, 사람들을 대신해 작가가 쓴 주문은 절실하고, 위급하고, 절절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완전한 삭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맞닥트린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차후의 작업에서 작가가 풀어낼 과제이면서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은, 예고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지울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사라지게 할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잊히게 할 것인가. 


언어와 신체의 경계에서, 이번 전시의 주제다. 언어와 신체의 상호작용성과 상호호환성과 같은 상보적 관계(상보성)를 겨냥한 것일 터이다. 언어와 신체를 합치면 몸 언어가 된다. 아마도 몸 언어를 직접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왕치의 이전 작품 <어법>(1977, 제5회 앙데팡당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소환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이번 전시는 아카이빙 그러므로 미술사적인 의미도 있다). 

작품을 보면 사진이 2열로 배열돼 있는데, 각 아, 에, 이, 오, 우라고 발음하는 입 모양을 포함한 얼굴 사진이 배열돼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시멘트 바닥에 대걸레(물걸레)로 발음 그대로 한글로 옮겨쓰는 퍼포먼스 사진이 배열돼 있다. 당연히 이 2열의 사진은 서로 연동된 것으로 봐야 하고, 그럴 때 비로소 그 의미도 분명해진다. 캡션이 없는 상태에서, 더욱이 작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얼굴 사진을 보면, 얼추 유추는 할 수 있겠으나, 바로 그 음을 발음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이를테면 노래하는 장면을, 아니면 말하거나 시를 낭독하는 것과 같은, 다른 우연한 장면을 순간 포착한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아래쪽 사진에서 물걸레로 쓴 글자는 쓰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언어가 의미를 붙잡을 수는 없다는, 언어가 의미를 낚아채는 순간 이미 의미는 빠져나가고 없다는, 언어와 의미 간 유격과 함께, 언어의 불완전성(어쩌면 몸 언어와 같은 비정상 언어는 물론, 정상을 포함한 모든 언어가 불완전 언어다)을 증언하는 작업일 것이다. 

몸 언어를 매개로 한 작업은 또 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의 손바닥에, 몸 위에 작가가 자신의 서명을 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예술작품은 작가의 서명(사인)으로 완성된다. 그러면 피에르 만조니가 서명한 사람들처럼 관객들은 살아있는 예술작품이 되고, 걸어 다니는 조각(길버트와 조지)이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작가의 서명으로 나타난 제도적 장치를 일깨우는가. 작가의 서명이 문화적 사실임을 주지하는가(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작가는 그 제도적 장치를 인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굳이 서명 퍼포먼스를 하는 이면에는 서명으로 완성되는 예술작품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 관습, 상식을 문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예술작품에 권위를 부여해 예술작품이 하나의 상품이 되게 만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문제시하는 부분이 있다. 물걸레로 쓴 글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이 손을 씻는 순간 지워지고 없는, 잠시 잠깐 예술작품이 되었다가 다시 예술작품 아닌 것으로 되돌려지는, 서명을 통해 작가는 예술의 장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로 남아있는 서명의 관례를 문제시하는 부분이 있다(아마도 롤랑 바르트의 상호텍스트성과 저자의 죽음 논의, 복수적 텍스트 그러므로 의미론적으로 열린 텍스트, 그러므로 누가 말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의 장례식을 치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원작을 보면, 뒤샹 자신의 서명 대신, R.MUTT 1917, 이라는 사인이 돼 있다. 제품명 아니면 회사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혹자는 묵음으로, 할 말이 없음, 이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했다). 기성품 변기를 전시장에 들여다 놓은 것이니 당연히 그 변기를 생산한 제품 아니면 회사명으로 서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달라진 맥락을 전제로 기성품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일까(예술은 맥락의 문제고 제도적 장치의 문제라는 발상으로 개념미술을 예고하고 있는). 아니면, 말장난으로 또 다른 자신을 그렇게 명명하고 서명한 것일까(뒤샹은 언어유희에 능해 자신을 곧잘 

어느 경우이든, 여하튼 서명은 있다. 그 서명이 어떤 종류이든, 서명 자체가 이미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가 장례식을 치를 때 문제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명은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는. 서명은 작가를 표상한다는. 결정적으로는 서명이 예술작품으로서의 상품적 가치에 방점을 찍는다는. 어떻게 보면 예술작품을 한갓 상품으로 둔갑시킨다는. 

그렇게 작가는 작가의 서명이 없는 뻥튀기를, 서명이 없는 김을, 서명이 없는 돌돌이(먼지를 포집하는 가정용 제품)를, 서명이 없는 담금주를 전시하고,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때로 서명을 한 뻥튀기를 나눠주기도 하지만, 뻥튀기를 먹으면서 덩달아 서명도 없어진다. 이것들은 다 뭔가. 단색화가 변주된 형식지점들이다. 생활 속에 숨어있는 단색화를 발굴(발견, 작가에 의해 발견된 오브제)한 것이고, 단색화가 일상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생활 속 단색화를 실현한 것이고, 일상이 곧 예술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선언이기는 하다. 요셉 보이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그동안 모노크롬과 코리안 모노크롬으로 부르던 경향성의 회화를 단색화의 고유명사로 명명하고 표기할 것을 제안하고 정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가 비평에 진력해온(작가는 비평가이기도 하다) 한 축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그 또 다른 한 축이 단색화다. 그렇게 단색화에 진력해온 나머지 마침내 단색화가 생활이 되었고 일상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사물에도 격이 있다고 했다. 물격이다. 다르게는 사물 인격체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물건에, 알만한 어떤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 사물에, 시간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물에 애착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사물은 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전환된다고 했는데, 이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물이 그렇고, 사람을 이롭게도 해롭게도 하는 주물이 그렇고,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우는 것이 그렇고, 요즘으로 치자면 각종 애완물건(이를테면, 애완 돌과 같은)이 그렇다. 

작가는 일전에 버려진 물건을 주워 와 간직한 적이 있다. 작가에 의하면, 예사롭지 않은 에너지를 발산하는(물격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작가에 의해 선택된 오브제라고 해도 좋다. 속이 빈 동그란 테 형태의, 가죽이 벗겨진 장고의 한쪽 면 같기도 한 낡고 해진 물건인데, 이번에 그 물건을 작가 서명도 없이 잠시 전시하다가, 사람들이 보란 듯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작가는 물고기를 방생하듯 사물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물건이 작가의 작품인지, 작가가 작품을 버렸는지 묻는다. 비록 서명이 없지만, 작가에 의해 선택된 오브제라는 상황 논리만으로 이미 예술의, 예술작품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고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퍼포머 성능경이 돌발적으로 개입했는데, 작가가 버린 사물을 다시 주워 챙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걸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주운 것인가. 그리고 이후 그가 실제로 그걸 집에까지 가져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해 알 수가 없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서명이 예술작품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지, 작가가 선택한 오브제가 예술작품이 될 수는 없는지, 예술과 일상, 예술적 행위와 일상적인 행위를 나누는 것이 정당한지, 정당한 부분이 있다면 그 근거가 뭔지 묻는다. 여기서 다시,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라는 정의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