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명은 결국 한 몸일 수밖에 없다...문명산수를 통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이 융합되는 경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인간 문명과 역사 그리고 자연이 함께 성립할 수 있는 상황적 기준을 모색하는 것이다...세계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이루는 다층적인 존재의 층위들이 깊고 미묘하게 얽히면서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현현하는 지적 구성체이다.
무위자연에서 문명산수로. 추상미술의 갈래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들 수 있다. 회화의 당위성을 형식요소에서 찾는다고 해서 형식주의로도 부르는데,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것이다.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것인 만큼, 최소한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보는 것인 만큼 주제가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형식주의 회화가 아니라면, 보통 주제는 회화를 해석하는 단서가 될 수 있고,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주제는 결정적이다. 주제가 애매하면 그림 또한 모호하고, 주제가 분명하면 그림 역시 오롯해진다. 그런 점에서 주제에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 이광영의 그림에서 주제는 어떤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작가는 원래 무위자연에서 시작해 근작에서 문명산수를 주제로 변화한다. 변화라기보다는 무위자연이 문명산수로 진화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가. 무위자연은, 자연에는 인위가 없다는 말이다. 자연 그러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에게,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적인 존재에게 어떤 인위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자연에는 인간의 인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자연은 인식 이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인식 밖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을 알 수 없는가. 인간의 인식은 자연에 가닿을 수 없는가.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그러므로 건널 수 없는 강이라도 흐르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말이 있다. 우주적 살(메를로 퐁티)이 있고, 물아일체(장자)가 있고, 사해동포주의가 있다. 세계와 나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세계와 나를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고, 세계와 내가 이미 한 몸이라는 말이고, 인간과 자연, 자연과 문명이 이미 하나라는 말이다. 그렇게 사태는 해결되었는가. 그렇게 인간과 자연은 화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어쩌면 이마저도 인간의 인식으로 본 이데올로기(그러므로 관념의 소산)일 수 있고,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의 시각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포스트 휴머니즘 그러므로 인간 이후다. 그렇게 작가는 무위자연을 넘어, 문명산수를 매개로 자연과 문명의 화해를 시도한다. 인간 이후의 시각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무차별한 세계를 제안한 것이다.
문명산수, 주상절리와 마천루의, 자연과 문명의 융합을 시도하다. 보통 깎아지른 절벽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의 한 경우로서, 세로로 긴 장방형의 각진 돌이 첩첩한 형세가 꼭 자연이 만든 작품 같고 시간이 빚은 조각 같다. 작가는 이 주상절리에서 도시에 빼곡한 빌딩 숲을 떠올리고, 마천루와의 닮은 꼴을 본다. 각 자연(과 자연의 시간)을 상징하는 주상절리와 문명(과 문명의 시간)을 표상하는 마천루를 차용하고 각색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문명이 다르지 않다는, 문명 또한 또 다른 자연일 수 있다는 주제 의식을 전달한다. 외관상 드러나 보이는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서 자연과 문명은 하나라는 작가의 평소 지론이 보아낸 풍경이고 발견한 정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주상절리와 마천루가 한 몸을 이룬 작품을 보면, 단단한 재료로 저부조 형태의 입체 조형을 만든 연후에, 그 위에 장석과 고령토와 숯과 같은, 자연에서 온 재료를 안료에 섞어 덧발라 마감한다. 평면이면서 입체고, 입체이면서 평면인,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경계 위의 조형이라는 형식실험이 시도되고 있다고 해도 좋고, 이로써 회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더욱이 여기에 입체 조형인 만큼 각진 조형 사이사이로 미묘한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려진 것을 통해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부르는,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불러들이는 조형 원리의 확장이 꾀해지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것이 시점 문젠데, 부감법이 그렇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평소 크게 보이던 것이 작게 보인다는 점에서, 미미한 존재와 살림살이를 각성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말의 윤리적인 태도가 반영된 경우라고 해도 좋다(반면, 작은 것도 크게 보이게 만드는, 우러러보게 만드는, 그래서 어느 정도 권력 지향적인 앙각법과 비교되는). 여기에 부감법으로 본 시점은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던 관계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관계 지향적인, 혹은 관계 친화적인 부분(덕목까지는 아니라고 해도)이 있다. 기본적으로 조형 원리에 착안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서 윤리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평소 작가의 심성이 표출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부감법으로 내려다본 작품이 흡사 축소판 지도 같다. 빼곡한 마천루 사이로 광장이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빌딩 숲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공원이 있고, 숲이 있고, 내가 흐르는. 실제로도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멀리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부감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경향으로 치자면, 중앙집중식이 강조된 경우가 있고, 비전형적이고 우연하고 유기적인 구조가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구분된다. 그중 전자는 아마도 어느 정도 관념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지도를 참조했을 것이다. 화면 중앙에 마을이 있고, 뒤쪽으로 산이 마을을 감싸면서, 앞쪽으로는 내가 흐르는 식의. 반면, 후자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표출에 바탕 한 자연의 생리에 가깝다. 아마도 자연화한 문명, 자연과 다르지 않은 문명, 또 다른 자연으로서의 문명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이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청색으로 나타난 색깔이다. 이 색깔에는 어떤 색채감정이 탑재해 있는가. 흰색은 순수를 상징한다. 처음 상태를 상징하고, 바탕을 상징한다. 현상학으로 치자면 현상학적 에포케 그러므로 잠정적인 판단중지를 상징한다. 하얀 도화지에 물감이 스며드는 것을 두고 보자는 제안이다. 인간 이후의 시각에서, 자연과 문명과의 관계를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그리고 검은색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잿더미로 화한, 암울한 현실을 표상한다. 여기에 그 재료가 숯이다. 숯은 양가적인 의미가 있는데, 폭력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의미가 있다. 문명(과 자연)을 잿더미로 만든 무분별한 욕망과 폭력적 현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피폐해진 현실을 재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색은 물을 상징하고, 정화를 상징한다. 자연에 혈류가 흐르듯 소셜네트워크(그 자체 현대적 관계망이라고 해도 좋을)와 같은, 도시 문명에 망을 따라 흐르는,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작가는 문명산수를 현현하는 지적 구성체로서의 풍경으로 정의한다. 세계를 이루는 다층적인 존재의 층위들이 깊고 미묘하게 얽히면서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풍경이다. 작가가 보아낸 문명의 비전이며, 작가가 재구성한 문명의 풍경이다. 풍경이 뭔가. 자연을 보고 있으면,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이처럼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풍경이 열린다. 자연으로 건너간 것들이, 자연에 투사된 나의 감정과 사유와 관념이, 자연에 대한 나의 해석이, 그러므로 내가 풍경을 연다(내가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지적 구성체로 재구성한 풍경을 통해 주상절리와 마천루가, 자연과 문명이, 인간과 비인간이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렇게 화해하는, 융합되는, 한 몸을 이룬, 무차별적인, 사해동포주의의 문명사적 비전을 제안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