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대나무 숲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 보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처음엔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인가 했다(실제로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알만한 형상이 없는,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붓질이 난무해 보이는, 엷은 먹과 짙은 먹이 중첩되면서 화면 속에 깊이를 만드는, 거칠고 부드러운 짧은 붓질이 겹겹이 포개지면서 화면 속에 레이어를 만드는, 선이 살아있거나 짓이겨진 붓질이, 빠르고 느린 붓질이 어우러지면서 동적이고 정적인 느낌의 암시적인 화면을 만드는, 그리고 붓질 사이사이로 하얀 여백이 드러나 보이는, 흑백 모노 톤의 화면이 수묵을 형식 실험한 그림인가 했다. 수묵의 생리를 따라 그린 내면 풍경인가 했다. 수묵의 형식논리를 빌려 비가시적인 자연의 생명력을 그린 그림인가 했다. 기운생동과 같은, 수묵의 생리를 그린 수묵 추상인가 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는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 대나무 숲을 올려다보면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대나무 숲속에 드러누워 올려다본 것일 터이다.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서 대나무숲을 그린다? 사물 대상 속에 들어가서 사물 대상을 그린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사물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물 대상에 스스로 동화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물 대상 속에서 사물 대상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사물 대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사물 대상에 동화된 자기를 그리는 것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물 대상과 자기를 나누는 경계가, 벽이 허물어지면서 혼연일체가 되는, 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내가 되는, 주와 객이 합일되는, 그런, 물아일체(장자)의 경험치를 그린 것일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으로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나와 세계는 서로 포함하고 연장되는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있다. 물아일체의 현상학적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이 경험치, 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내가 되는, 내가 세계가 되고 세계가 내가 되는, 주가 객이 되고 객이 주가 되는, 이 경험치는 다만 관념적인 경지며 차원을 말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대나무숲에 드러누워 올려다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대나무가 보이고, 대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빽빽하고 성글게 흐르는 공기가 보이고, 댓잎을 흔드는 바람이 보이고,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이고, 그림자를 희롱하는 햇볕이 보이고, 댓잎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보이고(보이는 소리 그러므로 공감각적인 소리), 그것들이 서로 얽히는 관계가 보이고, 종래에는 그 관계마저 지워진 유기적인 전체(그 자체 원형적인 이미지라고 해도 좋을)가 보인다. 

숲속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것들이다. 의식의 끈을 놓고 보면 보이는 것들이다. 관계가, 사물을 가름하는 경계가,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의식이 지워지면서 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서 의식이 지워진다는 것은 곧 내가 지워진다는 것이다(내가 곧 의식이다). 그렇게 지워진 나는 바람이 되고, 그림자가 되고, 소리가 된다(선불교에서의 흐르는 주체). 자연에 동화되면서, 자연에 합일되면서, 현상학적 에포케 그러므로 잠정적인 판단중지가 일어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지워지면서 오롯해진다. 나를 잃으면서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대나무 숲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관념적인 경험치를 감각적인 경험으로 실현하고 있었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그렇게 건너가는 것과 건너오는 것이 만나는 지점에 풍경이 열린다. 여기서 건너가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내가 건너가는 것이다. 자연에 내가 건너가면서 풍경이 열리는 것. 그렇게 나는 자연에서 풍경을 연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곧 나를 그리는 것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세목이 지워진, 세목보다는 분위기가 강한, 다만 유기적인 전체로서 오롯한, 바람이 부는 것도 같고 수런거리는 것도 같은, 정적인 것도 같고 바람에 가만히 떠는 것도 같은, 대나무 숲속에서 하나의 풍경을 열어놓고 있었다. 내면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어쩌면 하나의 우주라고 해도 좋을, 자기만의 풍경을 열어놓고 있었다. 


존버거는 다르게 보기, 그러므로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에 예술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다르게 보기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시각적 경험을 매개로 한 인식 전환을 의미할 것이다. 그 근간이 되는 것이 시점 문제다. 시점이 달라지면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사각지대(감각적 사각지대)가 그렇고, 비가시적인 것(인식론적 사각지대)이 그렇다. 폴 클레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고, 가시적인 것은 다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시점 문제다. 작가는 대나무 숲속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댓잎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햇볕이 보이고, 바람이 보이고, 공기가 보이고, 소리가 보이고, 이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유기적인 관계가 보인다. 중요한 것은 댓잎과 함께 댓잎을 흔드는 바람과 같은, 댓잎을 떨게 만드는 공기와 같은, 댓잎이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와 같은, 결정적으로는 이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유기적인 관계와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일이다(예술은, 특히 회화는 암시의 기술이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자연의 본성이라고 해도 좋을 자연의 생명력을, 에너지를, 호흡(숨 쉬는 자연)을 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서 유기적인 관계는 유기적인 전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이 유기적인 전체는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 작가는 자신이 직접 제작해 만든 막 붓으로 유기적인 전체를 그린다. 정상적인 붓은 아무래도 관성을 따라 그리기 쉽다. 우연한 자연, 스스로 그러한 자연, 무시로 흐르는 자연, 변화무상한 자연을 그리기 위해선 도구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유격에 적합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우연성과 즉흥성과 같은, 그 자체 자연의 생명력이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 방식 아니면 운동방식이라고 해도 좋을 변수 가능성을 포섭하는 데 적합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막 붓으로 유기적인 전체를 그려놓고 있는 작가의 화면이 빼곡하고 느슨한 댓잎처럼도 보이고, 난무하는 붓질처럼도 보인다. 구상 아니면 형상처럼도 보이고, 추상처럼도 보인다. 저러다 추상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은, 경계 위의 그림처럼도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추상과 형상(구상) 간 경계 문제를 건드린다. 추상과 형상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추상은 형상이 없는 그림이 아니다. 형상에 대한 안티테제가 아니다. 추상은 형상 속에 잠재적인 형태, 가능한 형태(그러므로 가능태)로 이미 내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추상은 형상의 가능성이고 잠재적인 형태다. 다시, 존 버거를 소환하자면, 형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계기가 제안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추상은 형상의 본성이다. 추상은 형상의 미래다. 


대나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대나무 숲속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세상과 단절된, 세상과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우주가 열리고, 내가 열린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지극히 바라보고 있으면, 세계가 열린다고 했다. 세계가 자기를 열어 자신을 내어준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공기를 밀어낸다. 댓잎이 파르르 떤다. 댓잎이 일렁인다. 댓잎이 수런거린다. 햇살이 댓잎을 희롱하고 그림자를 희롱한다. 어쩌면 나를 희롱하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내가 지워진다. 내가 지워지면서 더 잘 들린다. 내가 지워지면서 더 오롯해진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과 나를 가로막는 벽을 허물어 하나로 흐르는 대나무 숲으로 초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