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몸짓으로부터 발신된 관계와 소통의 메시지
한국의 무라노를 지향하는 유리섬이 변신을 꿈꾸고 있다. 체제 전환을 예비하고 있다. 변신도 체제 전환도 전시 콘텐츠가 관건이다. 전시 콘텐츠에 따라서 미술관의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전시들이 있었지만, 그리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유리섬만의 특수성을 반영한 정체성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유리섬만의 특수성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가 문제다. 유리섬의 특수성은 지역적 특수성(환경에 연동된)이기도 하고, 이보다는 장소적 특정성(사건에 연동된)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유리 고유의 물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유리섬의 특수성은 말하자면 유리의 특수성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유리의 특수성 그러므로 유리 고유의 물성이 갖는 성질로 치자면 반영과 반사, 굴절과 왜곡, 그리고 투과와 투사를 꼽을 수 있다. 하나같이 투명한 유리와 빛이 만나면서 유리를 넘어서고 빛을 넘어서는, 그렇게 장소를 점유하고 공간으로 확장되는 판타지를 열어놓으면서 비로소 자기를 실현하는 성질들이다. 그동안 이러한 성질에 착안한 전시들이 있었다. 유리를 소재로 한, 색을 소재로 한, 그리고 빛을 소재로 한 전시들이다. 주목되는 경우로, 스테인드글라스 그러므로 색유리를 소재로 한 전시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침내 유리와 영상이 만나는 전시를 열었다. 비록 영상 전시가 처음은 아니지만,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영상 전시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보인다. 유리와 영상에 공간연출이 매개되면서 유리와 영상을 넘어 공간 자체와 전체를 환영적인 환경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유리섬의 장소적 특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추후 미술관의 변신과 체제 전환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계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태를 단순화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영상 작가들의 작업 관행을 보면, 크게 서사에 방점이 있는 경우(영화에 가까운, 그래서 일종의 작은 영화라고 해도 좋을. 때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호흡이 긴 앤디 워홀의 예술영화에서 보듯 단편영화와는 다른. 그러므로 단순히 길이 그러므로 시간의 길고 짧은 문제가 아닌)와 영상이 주는 감각적인 효과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경우(공간연출에 바탕 한 무대예술에 가까운)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메인 작가로 참여한 진시영은 그 두 영역과 경향을 아우르는 작가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 논리에 따라서 시간성에 바탕 한 서사적인 영상작업(때로 근대사 그러므로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을, 그리고 더러 영상 자체가 주는 감각적인 효과에 바탕 한 영상작업(매체 사회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몸의 확장 그러므로 감각의 확장으로 봤는데, 매체에 대한 이러한 사실 혹은 정의와도 무관하지 않은)을 넘나드는 작가다. 영상작업에 관한 한 전천후형 작가라고 해도 좋다.
원래 작가는 일종의 빛 드로잉으로 명명할 만한 회화적 평면작업으로부터 시작했다(이후 영상작업과 함께 지금까지 병행해오고 있는). 카메라로 움직이는 사물 대상(피사체)을 찍은 것 같은, 사물 대상의 움직이는 궤적을 기록한 것 같은, 그렇게 사물 대상의 움직임을 몇 가닥의 유기적인 곡선으로 환원해놓은 것 같은, 그런, 사진 같은 그림이다. 카메라를 매개로 피사체의 깊이를 파고들기보다는(정적인 느낌의) 피사체의 움직임에(동적인 느낌의) 관심이 많았고, 그 관심 그대로 영상작업으로 옮겨가는(옮겨간다기보다는 연장되고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 카메라를 세상을 보는 눈에, 그리고 회화를 세상을 향해 열린 창에 비유하는데, 여기서 눈과 창은 상호 연관된 부분이 있고, 이런 상관성에 대한, 그리고 그 유비적인 의미기능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유리 조형 작가 김동선의 유리 조형 작업이 가세한다. 영상을 투사하기 위해선 스크린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스크린을 대신한 것으로서 일종의 변형 스크린 혹은 사물 스크린이라고 해도 좋다. 투명한 유리 소재의 조형물이 빛을 그리고 영상을 투과한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투명 스크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조형 자체를 보면 꽃을 소재로 한 것으로, 유기적인 곡선의 긴 꽃대(꽃대공) 위에 만개한 꽃이 매달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꽃 조형물을 바닥에 깔거나 공중에 매달아 설치하는 외에 조각에 가까운 단일 조형물을 설치해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는 식이다. 공간설치 형태의 작업이 동적인 느낌의 스펙터클 한 빛의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조각 설치 형태의 작업이 상대적으로 정적인 느낌의 집중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로 유도하는 편이다. 여기에 형태도 다르고, 두께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유리 조형물 위에 움직이는 영상이 투사되면서 천변만화한 빛깔(빛이 만든 색깔)의 만화경을 그려내고 있다.
유리 조형물 외에 투명 스크린은 또 있는데, 초극세사 실크 천이 그렇다. 완전 투명은 아니고, 사실상 완전 투명에 가까운 소재로서,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면 영상이 맺히면서 통과한다. 영상이 맺히면서 통과하는 것이 결정적인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복수의 스크린을 중첩해 설치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면 스크린을 통과한 영상이 스크린과 스크린 사이 공간을 점유하면서 마치 유사 홀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유사 입체영상을 보는 것 같은 시지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보는 것을 넘어, 실제로 만질 수는 없지만 만져질 것 같은 착시효과를 낳는 것이다. 시각적 경험과 촉각적 경험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가 되는 공감각적 경험이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스크린의 개수를, 각도를, 그리고 여기에 설치 방법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여하에 따라서 사실상 무한정 열려있는, 가변적인 공간연출이 가능한 작업이다.
영상을 보면 칠흑 같은 암흑(카오스 그러므로 절대 무질서) 속에서 최초의 별이 태어나는, 태초의 우주가 생성되는 극적인 현장을 보는 것도 같고, 우주의 배꼽(옴파로스)에 자라는 신성한 나무(우주수)를 보는 것도 같고, 우주의 섭리와 구조를 도해한 만다라를 보는 것도 같고, 전설 속 붕새와 불새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면서 날아오를 채비를 하는 것도 같고, 빛의 향연을 빌려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도 같고, 간단없이 흐르면서 변신하는 은하수를 보는 것도 같고, 나는 별과 가는 별이 교차하는, 생과 사가 순환하는, 생사 소멸의 공허(절대 우주 그러므로 절대 무)를 보는 것도 같다. 별빛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그려내는 천변만화한 만화경 속에 이따금 춤을 추는 무용수가 보이고, 그 위로 나비가 나는 것이 장자몽(나비가 나를 꿈꾸는)을 보는 것 같고, 몽중몽(꿈이 현실을 꿈꾸는)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춤추는 무용수가 보인다고 했는데, 사실은 영상 자체와 전체가 무용수라고 했다. 별빛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용수라고 했다. 춤추는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천변만화한 만화경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를 모나드라고 한다면, 모나드가 모여서 패턴을 만드는 것을 모듈 구조라고 한다. 작가의 영상작업에 적용해 보면 춤추는 사람들의 단위원소가 모여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구상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비정형 모듈 구조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왜 춤추는 사람들일까. 예술 기원론으로 치자면, 춤은 가장 오래된 예술에 속한다. 춤과 노래를 매개로 신과 소통한 것(제의)에서 최초의 예술이 유래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예술 기원론이 아니더라도 춤은 관계를 매개하고 소통을 매개하는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아마도 춤추는 사람을 영상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로 제안한 것에는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춤이 그런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와 소통을 발신하는 메신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