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이상(理想) 안의 이상(異常)한 여성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상상과 상징 이전의 나를 향하다
2006년 첫 개인전 이래, 13회 넘는 개인전을 연 황지현은 최근 20년간 발표된 주요 작품 중 약 70여점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는 이 작품들은 신화 속 여성이 등장하여 화려함과 강력함을 발산하는 붉은 여왕(Ruddy Queen), 방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삶과 작업의 드라마를 펼치는 내면 성소(Inner Sanctum), 여성의 생식기관을 통해 다양한 서사를 전개하는 자궁꽃(Uterus Flower), 그리고 작가가 ‘정신의 춤’으로 비유한 드로잉 작업으로 나눈다. 그의 작품은 꽃이나 길, 집, 여성 등 지시대상이 있으면서도 재현적이지 않고 비유적이다. 알레고리의 특성을 가진 그의 작품군들은 연결돼 있다. 그 세계는 깊이와 체계보다는 뿌리줄기같이 다층의 연결고리로 구축된 세계다. 그는 스스로 정한 원칙에 경직되기보다는 그물망적 출렁임으로 유연하게 작업한다. 하나로 떨어지는 대작도 있지만, 작품들이 이어지고 설치나 벽화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황지현, Drawing of Anxiety and Desire 불안과 염원의 드로잉, 2021, Pencil and pen on paper, 25 x18cm
원형이나 정사각형의 작은 캔버스들은 일종의 단위 구조가 되어 계속 이어질 텍스트를 쓴다. 가령 작품 [시간을 엮다](2018)는 여러 패널을 이어 큰 작품이 된다. 그룹전 [불안의 좌표]에 참여한 작품 [끝나지 않은 길 2](2018, 예술지구 P)은 여러 풍경이 무정형 형태로 이어지는데, 더 이어질 수도 있는 열린 구조다. 그의 많은 작품이 작가가 품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더 큰 작업은 천에다 그린다. 캔버스 작품과 병행되는 벽화는 징검다리처럼 작품과 작품을 이어준다. 이를 통해 그림 안과 밖이 연결되고 확장된다. 연결망은 ‘길’을 암시하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캔버스 화면 밖으로 길의 형상을 그려 넣어 회화 화면의 확장과 주체적인 여성성을 조명’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성의 길이자 작가의 길이고 둘이 겹치는 자신의 길이다. ‘길’이라는 키워드는 2012년 <끝나지 않은 길>(플레이스 막)부터 2023 <Her Own Way>(라운디드 플랫)에 이르기 까지 자주 등장한다.
황지현의 주요 주제는 페미니즘과 관련된다. 페미니즘은 문화의 여러 항목 중에서도 가장 많이 논의되고 그 성과도 많지만, 정작 여성 작가들은 그 용어를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 빈 수레처럼 요란하게 소비된 ‘이즘’이기도 했고, 그것이 보편이 아닌 반쪽의 진실만 다룬다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성’ 자체가 인간이나 역사라는 관념처럼 한 성에 기울어진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을 말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가령 예술가나 지식인)은 억압 내지 착취 받는 계층은 아니다. 더 열악한 위치의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한다는 관점도 진부하다. 협소한 영역에 머무는 전문가와 거대 서사를 말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비판했던 푸코가 주장했듯이,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미시적으로 발생한다. 만인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상적 행동 속에 억압(그리고 저항)이 발생한다. 근대의 패놉티콘 건축 구조 아이디어가 그렇듯이 권력의 내재화는 강제보다는 수월한 전략이다.
황지현, Drawing of Anxiety and Desire 불안과 염원의 드로잉, 2021, Pencil on paper, 29.5cm x21cm
황지현, Beyond the Universe 우주 너머, 2023, Pencil on Paper, 26.8x18.5cm
마녀사냥을 비롯한 공개재판과 처형의 관례는 감옥과 병원, 공장 등을 거친 후 집단이 아닌 ‘자유민’의 규칙으로 자율화됐다. ‘개인’ 자체가 체계적 좌표 속에 투명하게 자리하며 규범화 된다. 여성의 경우, 작고 하얀 얼굴과 마른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 하나하나에 깃든 억압을 생각해야 한다. 미용산업은 규모가 큰 사업 중 하나이며 ‘자신감 있는’ 여성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로 간주된다. 사업적 이익을 위해 고무되는 정체성 속에 여성이 자리하는 현실은 아름다움과 여성의 관련을 불편하게 만든다. 황지현 또한 굳이 여성이란 용어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만큼이나 억압돼 있던 ‘알레고리적 충동’(크레이그 오웬스)이 발휘되는 그의 작품에는 도처에 여성이 있다. 그는 ‘나의 작업은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지닌 모순되는 감정의 충돌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를 여성주의적 관점과 알레고리의 특성을 통해 회화로 연구한다. 사회 속 여성이 겪는 억압과 충돌 그리고 대응해 가는 모습들’을 탐색한다고 말한다.
그점은 소재로 분명해지는데, 그는 ‘자궁, 꽃, 집, 가족, 길 등의 작품 소재는 여성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주체적인 존재로 변화하며 마주하는 심리적 충돌과 감응의 모습을 드러내는 소재들’이라고 밝힌다. 가령 꽃은 생식기관으로서 여성과 많이 비교되지만, 그의 작품에서 꽃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어여쁜 모습으로 포개진 꽃잎은 음순처럼 나타나고, 할 말 많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푼다. 자세히 보면 그의 꽃에서 암술과 수술은 적출되어 있다. 예리하게 도려내진 부분은 그 핵심을 돋보이기 위해 진화된 여러 양태를 허깨비같은 것으로 만든다. 눈알 빠진 눈이나 이빨 빠진 입처럼 섬뜩하고 박탈감이 느껴진다. 남성이라는 유일한 성을 기준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거세에 해당되는 재앙이다. 꽃은 식물의 여러 기관 중 가장 섬세하고 약하지만, 그 존재의 절정이고 열매와 씨앗으로 기대에 상응하는 결과를 산출한다.
황지현, Ruddy Queen 1 붉은 여왕 1, 2024, Acrylic gouache on canvas, 130.3x97cm
황지현은 꽃에 대한 통상적인 상상과 상징을 약간의 조치를 통해 변화시킨다. 암술과 수술이 제거된 것 외에 미세한 털의 강조는 인체와 비교된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꽃의 형태는 텅 빈 구멍을 포함해서 소리를 내재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지배적 감각인 시각은 상대적 위치에 머문다. 타원형으로 벌어진 구멍은 눈(시각성)보다는 입(청각성)과 더 밀접하다. 그녀들은 말하고 듣는다. 동물과 달리 소리를 내지 못하는 식물은 그림으로 표현된 소리처럼 더 절박한 모습이다. 곡선으로 이루어지는 꽃의 선은 작가가 애호하는 증식되는 유기체 이미지를 제공한다. 대개 탑이나 건축 같은 경쟁적으로 높이 올라가는 인공적 구조물이 직선적이고 남성적 비유가 강함과 비교된다. 작품 [Inner Sanctum](2026)에서 중심부가 제거된 꽃, 즉 속이 텅 빈 생식기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사람은 여인이다. 아름다움은 상처와 고통을 포함한다는 내용은 자연이나 몸이라는 실재를 통해 강렬하게 다가온다.
성을 막론하고 생식기 자체는 아름다울 수 없는 기관이며, 자연적 운명이나 사회적 편견을 떠올리는 불편한 대상임에 틀림없다. 남성적 기준을 견지하는 시선으로 볼 때 여성의 생식기는 거세되어 피 흘리는 상처처럼 나타난다. 이는 기괴함의 원천이다. 린다 하트는 [악녀]에서 여성은 프로이트가 규정한 ‘기괴함’을 가진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기괴한 반응을 했다면, 우리는 자궁에 의해 환기된 매력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여성적 기괴함은 내부에 무언가를 숨긴 수상쩍은 틈부터 공격적으로 아가리를 벌린 괴물의 이미지에 편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깨무는 질(vagina dentata)의 이미지다. 루시 스미스는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에서 유디트를 비롯해 남성의 힘을 제거하는 신화적 여성들의 예를 든다. ‘깨무는 질은 마구 집어삼키려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며, 자궁은 ‘우리가 최초로 생명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상기시킨다’(루시 스미스).
황지현, Ruddy Room 붉은 방, 2024, Acrylic gouache on canvas, 90.9x72.7cm
엘리자베스 바뎅테는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모성, 원초적인 어머니가 때로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녀가 죽음, 퇴행적 귀환, 탐욕스런 자궁에 의한 흡입 등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뛰어난 남성적 행위는 괴물로 간주된 어머니-여성의 살해이다. ‘자신을 어두운 선사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의 젖가슴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이 자아 구축 행위에 실패하면 오직 죽음만이 남는다’(바뎅테). 비록 생식기는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다움의 유인력이다. 물신은 바로 그곳에 있다고 가정되는 환상들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부재하는 것을 대체물로 갈구하는 물신은 결코 하나로 끝나지 않고 계열을 이루며 끝없는 욕망의 추동력이 된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충격은 끝없는 보상을 욕망한다. 욕망이 실체가 없고 그래서 그칠 수도 없는 원초적 이유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욕망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들을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반향하는 라깡의 유명한 주장인 ‘사랑은 불가능하고 성관계는 없다’는 욕망의 목적이 욕망을 재생산하는 것이지, 욕망의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여성 또한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의 대상이 욕망의 주체가 되면 불길하다. 대상이 주체가 된다면 상대의 성에게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다. 린다 하트의 [악녀 fatal women]에 의하면 남성의 욕망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늘 달아나는 것으로 생산되어야 하는 여성은 남근 지배적인 리비도 경제에서 핵심적인 서사다. ‘남성적 상상계에서 욕망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상실된 대상을 반복적으로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산적 텍스트는 ‘그림자, 즉 유령, 우묵한 곳, 흔적, 필연적인 어둠을 필요로 한다. 여성을 일관성 있게 구성하기 위해 (남성적)주체는 어떤 비(非)지식을 전제’하며, ‘가부장적 지배 질서 속에서 여성은 바로 부재하는 공간, 즉 상징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결핍’(린다 하트)이다.
황지현, Ophelia 오필리아, 2024, Acrylic gouache on canvas, 130.3x162.2cm
‘여성을 수수께끼화 하는 것이 특정한 형태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방법이다. 여성의 수수께끼는 해답이나 진리가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남성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할 따름이다...여성성은 아버지의 법률인 가부장적 체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공백이었다.’(린다 하트) 남성적인 상상을 유지하는 버팀목으로 구성된 여성성에 대해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하지만 성은 단순한 상상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그 기관에서 생산되는 성호르몬이 2차, 3차 기관들에 영향을 주면서, 각 성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서로를 끄는 인력이 된다. 가령 [푸른 여인1,2](2025)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머릿결이 생식기처럼 변화하는 작품은 보이는 기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실체를 상상하게 한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노출된 여성의 가슴에서 보이지 않는 엉덩이를 보기도 한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하기로 살아가며 작업하는 이에게, 성은 기성의 상상과 상징으로 온통 가려진 실재에 접근하는 매개체다.
그의 작품은 둥근 캔버스가 종종 등장하는데 마치 현미경으로 심신의 상태를 관찰하는 듯한 구조다. 작품 [Encounter](2019)에서 30x30cm 크기의 둥근 화면 안에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에 발생되는 감정적 기류에 포커스를 맞춘다. 찻잔 안의 폭풍처럼 전개되는 흐름은 마주한 서로를 세차게 흔들 것이다. 렌즈 안에 포착된 장면은 사람 간의 말 없는 사건의 현장이다. 여러 화면을 통해 얼굴화된 생식기는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 이전 단계의 내 모습이 전치된 것이다. 누군가 퇴행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거꾸로 행보다. 상상과 상징이 구조화되기 이전의 단계로 역행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조건이다. 자궁으로의 회귀는 갱신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다. 음문(陰門)으로 노저어 가는 여자를 그린 [불안과 염원의 드로잉](2021)처럼 자궁은 역행의 주요한 목표다. 로버트 A 존슨은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서 바다에서 태어난 여신 아프로디테의 예를 든다.
황지현, Woman and Son 여인과 아들, 2024, Acrylic gouache, Crackle medium on canvas, 162.2cmx130.3cm
‘태고의 바다같은 여성성을 보여주는 아프로디테는 의식이 발달하기 이전의 진화적 시간을 의미한다...아프로디테가 가진 특질 중 하나는 끊임없이 퇴행하려는 성질이다. 그 여신은 사물을 원래 태어났던 자궁으로 되돌리려 한다’(로버트 존슨). 상징의 다가(多價)성 때문에 이러한 되돌림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만 자궁으로의 회귀는 직선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미궁과 비교된다. 로버트 존슨은 중심에 도달할 때까지는 도망칠 수도 휴식도 없는 미궁이 삶의 특징이라고 보면서, 궁극적으로 그 도달점은 신비로운 자궁이라는 중심으로의 회귀라고 말한다. 황지현의 작품 속 인물 또한 이러한 미궁의 여행자인 셈이다. 미궁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작가가 거부하는 직선적인 것인데, 이는 ‘남성적인 것으로 인간이 발명하고 건설한 것이고, 수많은 규칙과 전통이며 시스템을 뜻한다’(로버트 존슨). 그것은 황지현이 소재로하는 식물이 곡선적인 것과도 관련된다. 탄탄대로나 지름길 없는 여성의 길 또한 구불구불하다.
황지현의 작품은 매끈한 형식보다는 생각과 감각을 표현하는데 집중된 만큼 거칠고 산만한 측면도 있다. 그가 드로잉 부문을 따로 강조한 것도 의식이나 이성의 감시나 조율을 피해 몸과 무의식이 말하는 바를 즉발적으로 표현하려 함이다. 늘 곁에 두고 있는 종이와 연필로 순발력 있게 제작되는 드로잉은 상상과 상징 이전의 세계를 겨냥한다. 일단 그리고 해몽(해석)은 나중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두 입술로 포개진 실재는 심리적 사회적 상황과 연결된다. [불안과 염원의 드로잉](2021) 시리즈는 아래로 흐르는 물과 위로 타오르는 불 이미지를 대조한다. 그것은 우울증과 조광증처럼 원소의 상태와 비교될 수 있는 심신의 양상이다. 거칠고 빠른 필치로 내부에 있는 것을 종이에 쏟아내는 드로잉은 형식적 조율보다는 분출되는 것을 바로 받아낸다. 종이에 연필이라는 조합은 그리면서도 쓰는 재료이다. 그는 A4 용지에 작업 구상을 포함하여 수시로 드로잉한다.
황지현, Running Women 달리는 여인, 2023, Acrylic gouache on unstretched canvas, 226x143cm
손에 익고 쉽게 펼칠 수 있는 연필과 종이의 작품 범위는 무의식의 지동기술에서 사회적 발언에 이른다. 드로잉 작품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이뻐](2022), [레깅스가 잘 어울리시네요](2022) 등은 긴 머리 위에 자궁 꽃들이 가득 피어 있거나 몸매 드러나는 레깅스에 자궁 꽃 문양을 통해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세태를 풍자한다. 타자가 겪은 일은 보편화되곤 하는데,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태는 이제 여성을 넘어서 모두에게 압박으로 다가온다. [Beyond the universe](2023) 시리즈는 저 높은 고지에 있는 고난의 길을 도약을 통해 도달하려는 여성, 요컨대 높은 건물의 위에 있는 여성을 통해 성취를 위해 필요한 비범한 능력이나 노력을 표현한다. 그녀는 타자화된 이들이 더 노력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의 개인전 중 <The Universe>(2009년, T-space)이 있음을 떠올려 볼 때,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거듭해서 갱신해 나가야할 세계이다.
(2편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