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6 16회 광주비엔날레》(2026.9.5-11.15)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6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작품론
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2026 9.5 – 11.15
멜빈 모티: 단 하나의 숨결에 바치는 송가
이혜림
변화는 흔히 파열과 위기의 순간에 가장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날마다 마주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듯, 변화는 소리 없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와 그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실천에는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주변의 변화는 때로 내 삶의 변화가 된다. 만성 질환을 앓는 동반자의 곁에서 멜빈 모티(Melvin Moti)는 계획을 취소하고,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기다리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의 동반자는 2017년 폐 이식 수술을 받았고, 2024년에는 석 달 동안 중환자실에 머물렀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어느 맑은 날 On a Clear Day〉(2021–2026)은 이 시간을 가로질러 제작되었다. 모티는 작업에 부친 글에서 쓴다. “유일하게 지속되고 확실한 것은 중단뿐이다.”2)
네덜란드 출신의 시각예술가 모티는 역사적 사건과 과학적 현상, 영적 믿음을 조사하고 이를 영화와 사진, 책, 오브제 등으로 재구성해 왔다. 예컨대 〈노 쇼 No Show〉(2004)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소장품을 대피시킨 에르미타주 미술관(Hermitage Museum)에서 안내자가 빈 액자를 가리키며 그림을 설명했던 일화를 재구성한 작업이다. 모티는 비어 있는 전시실의 영상에 부재하는 그림을 묘사하는 목소리를 결합했고, 이듬해 제작한 〈검은 방 The Black Room〉(2005)에서도 영상과 음성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도록 했다. 고대 로마의 벽화를 천천히 훑는 화면 위로, 초현실주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가 자신의 최면 경험을 이야기하는 가상 인터뷰가 흘렀다. 한편 2017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코스미즘 Cosmism〉(2015)은 태양 활동과 전쟁·혁명 같은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던 주장을 다뤘다. 고대와 근대, 부재하는 그림과 그것을 기억하는 언어, 태양의 변화와 지상의 사건들. 모티의 작업에서 역사는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영역이 잠시 맞물리는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선이 이제 개구리의 배에 머문다.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작은 배,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보내는 움직임. 우주와 역사를 가로지르던 작업의 규모가 한 번의 호흡으로 좁혀진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작아진 것은 아니다. 숨 쉬는 일이 하루의 과제가 된 몸에게는 그 짧은 움직임에 삶 전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41분 30초 길이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개구리들은 숨 쉬고, 앉고, 일어서고, 춤춘다. 한 마리는 몸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일본의 수련법인 카츠겐 운동(活元運動)을 수행하고, 다른 한 마리는 재즈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과 함께 흐르는 합창과 오케스트라 음악은 질병으로 호흡과 발화가 달라진 동반자의 목소리에서 형태를 얻었다. 가사에서는 “지금 나는 기도한다”, “지금 나는 춤춘다”, “지금 나는 두렵다”, “지금 나는 아프다”처럼 ‘지금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반복된다. 같은 문장 구조 안에서 움직임과 생각, 감정과 통증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 사이로 텅 빈 공간과 숨결, 비행과 꿈을 노래하는 구절도 이어진다. 목소리는 화면 속 동작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은 채 음악의 일부로 흐르며, 개구리의 움직임에 신체의 여러 상태와 상상을 겹쳐놓는다.
이러한 반복은 소리뿐 아니라 영상에서도 나타난다. 중간에 등장하는 격자는 선과 간격을 반복적으로 탐구한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맑은 날〉이라는 제목 역시 마틴의 동명 판화 연작 《어느 맑은 날 On a Clear Day》(1973)과 같다. 그러나 모티가 마틴에게서 빌려온 것은 제목과 격자만이 아니다. 그는 작품에 부친 글을 마틴의 1976년 강연 「무엇이 현실인가 What Is Real」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마틴이 “예술가에게 중단은 재앙과 같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모티는 예술적 수련을 계속해서 이어주는 ‘은빛 줄(한 줄기의 희망, silver cord)’을 붙잡는 일에 주목한다.
그런데 모티의 생활에서 중단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돌봄은 정해진 작업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역시 미리 확보하기 어려웠다. 중단이 재앙이라면, 중단이 일상이 된 예술가는 어떻게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모티에게 필요한 것은 중단되더라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실천이었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조건에서 선택된 매체다. 짧은 시간 동안 일부를 만들고, 필요할 때 멈추고, 이후에 돌아와 작업을 계속하는 방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모티의 글에서 ‘은빛 줄’은 발음이 같은 ‘은빛 화음(silver chord)’으로 변주된다. 이 언어유희는 예술적 수련과 영화의 음악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그는 즉흥 연주의 짧은 선율 단위인 릭(lick)을 만트라에 비유한 바 있다. 같은 선율을 거듭 연습하면 몸에 익은 패턴이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자발적인 연주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영화의 가사에서도 반복되는 형식과 달라지는 내용이 함께 작동한다. ‘지금 나는’이라는 짧은 구절 뒤로 기도하고, 춤추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상태가 이어진다. 문장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매번 다른 상태를 말한다. 마치 반복은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일정한 틀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춤과 비행뿐 아니라 가라앉음과 충돌, 두려움과 통증도 들어 있다. 따라서 이 반복을 회복을 향한 꾸준한 전진으로 읽기는 어렵다. 대신 서로 다른 상태를 말하는 문장들은 ‘지금 나는’이라는 구절로 매번 현재를 짚는다. 그중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앞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곧 나아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며, 같은 문장으로 돌아와도 그때의 상태는 달라질 수 있다. 모티가 치료 과정에서 조금 나아지고 있는지, 혹은 뒤로 물러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미묘한 감각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고 쓴 것도 이와 맞닿는다. 가사는 그러한 상태들을 하나의 경과로 정리하지 않고, 두렵거나 아픈 순간에도 이어지는 현재의 삶을 짧은 문장으로 거듭 확인한다.
중단 속에서 작업을 지속해야 했던 모티의 생활도 이와 닮아 있다. 작업으로 돌아올 때마다 주어진 시간과 상황은 달라졌지만, 작은 행위를 반복하는 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 ‘은빛 줄’을 붙잡는 일은 한곳에 집중을 유지하는 데서, 그때 가능한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쪽으로 옮겨간다. 익숙해진 반복 속에서 몸이 스스로 움직일 여지가 생길 때, 줄은 ‘은빛 화음’으로 변주된다. ‘지금 나는’ 뒤에 매번 다른 말이 이어지듯, 그의 작업도 달라진 생활에 맞추어 그 순간 가능한 형태를 얻으며 계속된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거대한 명제 앞에서 〈어느 맑은 날〉은 삶이 달라질 때 예술의 실천도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동반자의 달라진 몸에 맞추어 하루를 조정하고, 작업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돌봄으로 분절된 시간은 작품 제작 방식을 바꾸었고, 음악은 반복되는 문구 안에 몸과 마음의 여러 상태를 담았다. “단 하나의 숨결에 바치는 송가”라는 모티의 표현은 그 숨결을 지키기 위해 재편된 일상과 그 안에서 새롭게 찾아낸 작업 방식을 함께 아우른다.
이혜림(2000-) hyerimlee@ewha.ac.kr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수료. 동시대 미술 전반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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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가이드」, https://youmustchangeyourlife.kr/#guide-to-you-must-change-your-life (2026년 10월 19일 접속).
2) 작품 설명과 작가의 글은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멜빈 모티」 참조. https://youmustchangeyourlife.kr/#melvin-moti (2026년 10월 19일 접속).

멜빈 모티, 〈어느 맑은 날〉, 2021–2026,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41분 30초 © 이혜림

멜빈 모티, 〈어느 맑은 날〉, 2021–2026,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41분 30초 © 이혜림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