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6 16회 광주비엔날레》(2026.9.5-11.15)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6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작품론
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2026 9.5 – 11.15
아만다 헹: 일상의 몸짓으로 관계를 다시 쓰다
최아연
한 여성이 찻주전자에 물을 붓는다. 옆 화면에서는 또 다른 여성이 텃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아만다 헹(Amanda Heng Liang Ngim, 1951–)의 영상 〈베스트 타임 Best Time〉(2023–2024)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차를 내리고, 골목을 걷고, 집을 손보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 너무나 익숙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이 몸짓들을 헹은 예술의 재료로 삼는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익숙한 행위를 새롭게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만나는 일이다. 헹은 이렇게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 대해 묻고, 예술이 우리 삶에 실제로 끼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헹의 예술적 관심은 그가 성장한 싱가포르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 속에서 자랐고, 동시에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다인종·다언어 국가로 발전해 온 싱가포르를 온몸으로 겪었다. 중국어 교육으로 익힌 문화적 정체성과 영어 중심의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사이의 간극, 그리고 가정 내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언어, 문화, 성별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헹은 30대에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을 시작했으며, 1988년 싱가포르 라살 예술대학교(Lasalle College of the Arts)에서 판화를 전공한 후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에 나섰다. 그는 싱가포르의 실험미술을 이끈 아티스츠 빌리지(The Artists Village)의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9년에는 싱가포르 최초의 작가 운영 여성 미술 단체 위민 인 디 아츠(Women In The Arts, WITA)를 세우기도 했다. 1)
초기 작업에서 헹은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질문했다. 첫 퍼포먼스 〈그/녀 S/HE〉(1994)는 1966년 시행된 이중언어 정책 이후 점점 고립되어 간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공자의 말을 소리 내어 읊고, 밀가루와 물을 반죽해 관객을 향해 던진다. 2) 이 행위들은 여성에게 덧씌워진 유교적 규범과 한 사람을 주변부로 내모는 언어의 힘을 말이 아닌 몸으로 드러낸다. 이후에도 헹은 언어가 미처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언어와 달리, 몸짓은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누구와도 나눌 수 있다. 헹은 이러한 몸짓을 매개로 관객을 작업 안으로 불러들였고, 작업의 중심 또한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장되었다.
그 변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업이 〈대화를 합시다 Let’s Chat〉(1996–)와 〈걸어갑시다 Let’s Walk〉(1997–2001)이다. 〈대화를 합시다〉는 사람들이 둥그런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숙주를 다듬으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참여형 퍼포먼스이다. 싱가포르의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던 풍경에서 착안한 이 작업은 일상적 가사노동을 소통과 교류의 기회로 전환한다. 참여자들은 정해진 규칙이나 대본 없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잠시 동안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경험을 하게 된다. 3) 〈걸어갑시다〉는 퍼포먼스의 무대를 도시의 거리로 옮긴다. 참여자들은 하이힐을 입에 문 채 손거울에 의지해 뒤로 걷는다. 이 퍼포먼스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시기 여성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해고되었던 상황에서 출발한다. 당시 일자리를 지키려는 여성들이 미용실과 성형외과를 찾으며 미용 산업은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4) 이 작업은 능력보다 외모로 여성을 평가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여성의 신체에 부과되는 사회적 규범을 비판하면서 익숙한 도시 공간을 낯설게 경험하게 한다.
국내에서 헹의 작업은 주로 사회 참여와 여성주의, 관계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소개되어 왔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여기에 시간이라는 축을 더한다. 〈또 다른 여성, 광주, 1996, 2014, 2023 Another Woman in Gwangju, 1996, 2014, 2023〉(2026)은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약 30년에 걸쳐 찍은 세 개의 사진 연작을 한자리에 모은 작품이다. 이 작업은 1996년, 어머니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정에서 자란 헹은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 언어의 장벽 때문에 어머니와 깊은 유대감을 쌓지 못했다. 어머니가 사용하는 방언에 서툴렀던 그는 자신의 삶과 예술 활동을 어머니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어머니와의 공동 작업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모녀는 카메라 앞에서 함께 다양한 자세를 연출했고, 그 퍼포먼스는 사진의 형태로 남았다. 나란히 놓인 세 연작은 시간이 두 사람의 몸과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보여준다.
1996년의 첫 연작에서는 모녀 사이에 어색함과 긴장감이 감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든 딸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 옆의 사진에서 어머니의 팔이 딸의 몸을 감싸고 있지만, 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또 다른 사진에서 화려한 꽃무늬 상의를 입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지만, 하얀 원피스를 입고 팔짱을 낀 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다. 새까만 단발머리의 딸과 회색빛 파마머리의 어머니는 흰 배경 앞에 나란히 서 있지만, 엇갈리는 시선은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부각한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손바닥에 적힌 ‘Love’라는 글자, 딸의 맨등을 어루만지는 손길, 눈을 감은 채 서로를 끌어안은 모습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과 친밀해지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다소 경직되고 엉거주춤한 포옹은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8년 뒤인 2014년의 사진에서는 이러한 긴장감이 한결 누그러진다.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을 때 어머니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지고, 함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 브이를 그려 보기도 한다. 여전히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순간도 있지만, 허리를 감싼 채 나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함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듯하다. 어느덧 딸의 머리카락에도 회색빛이 내려앉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2023년의 마지막 연작에서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모녀의 역할이 뒤바뀐다.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는 이전보다 작아지고 쇠약해졌으며, 이제는 딸의 품에 안겨 보호받는다. 한때 딸을 감싸 안았던 어머니의 손길을 대신해 딸은 어머니의 몸을 받치고 보듬는다. 딸의 어깨에 올려진 어머니의 발은 오랜 삶의 무게와 수고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친밀감을 시각화한다. 새하얗게 센 머리를 맞댄 두 여성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이전의 어색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들고 있던 딸. 이제는 나이 든 어머니를 자신의 품에 안는다. 딸은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며, 어머니는 딸을 통해 지나온 삶을 마주한다. 두 사람의 신체에는 서로 다른 시간과 경험이 새겨져 있지만, 그들이 함께 수행한 몸짓과 접촉은 그 시간을 하나로 연결한다. 엇갈린 시선에서 서툰 포옹으로, 그리고 서로 맞댄 머리로 이어지는 모녀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이들이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조용히 되짚는다.
〈베스트 타임〉은 일본 나오시마와 싱가포르의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 2채널 영상이다. 집과 마당, 텃밭, 공원, 동네 골목 등을 배경으로 여성들이 차를 내리고, 글씨를 쓰고, 산책과 스트레칭을 하고, 집을 손보거나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솔바람이 지나간다. 두 화면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이어지는 일상의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주며, 각각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생활의 소리는 서로 겹쳐져 하나의 느슨한 리듬을 형성한다. 두드러지는 대화나 극적인 사건 없이 이어지는 장면들은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와 그 안의 고요한 순간들에 주목한다. 여기서 헹의 시선은 어머니와 딸이라는 가족의 관계를 지나 다른 여성들의 삶으로 향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꾸려 가는 여성들을 나란히 두어, 특별한 사건이나 성취로 요약되지 않는 생의 시간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제목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1908년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가져왔다. 시의 화자는 부서진 고대 조각상을 마주한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방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이것이 찰나의 각성이라면, 헹의 작업이 보여주는 변화는 훨씬 느리고 고요하다.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고, 함께 걷고,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날마다 차를 내리는 작은 몸짓들이 모여 비로소 이루어진다.
최아연, ayeonchoi@ewha.ac.kr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한국과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탈식민적 시각으로 읽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2) 아만다 헹·샤메인 토(Charmaine Toh) 대담, 「She Takes Her Path: Amanda Heng in Conversation with Charmaine Toh」, 싱가포르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Singapore), 2019.
3)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12.7.–2024.3.3., 출품작 〈대화를 합시다〉(1996–) 작품 설명 참조.
4)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9.3.–2025.3.3., 출품작 〈걸어갑시다〉(1997–2001) 작품 설명 참조.
참고문헌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가이드」.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2026. https://youmustchangeyourlife.kr/#guide-to-you-must-change-your-life (2026년 10월 21일 접속).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가변 크기 (20), 작가 제공,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 지원 ⓒ최아연
아만다 헹(Amanda Heng), 〈베스트 타임 Best Time〉, 2023-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20초, 작가 제공,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 지원 ⓒ최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