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검게 변해가는 플라타너스를 밟으며 서울미술관에 걸어갔다. 아무리 아기자기한 부암동이더라도 일터의 면적 안에 드는 동네라 더 멀리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런 기분즘은 공짜로 받은 티켓 한장이면 사뿐이 눌러버릴 수 있다!? (하하^^ 티켓을 주신 소장님께 감사!) 지층에 면세 화장품 가게가 있어 진치고 있는 관광객 무리를 보고 있자면 미술관까지 싸잡아 거리를 두게 되지만, 일단 들어서면 좋은 곳이다 서울미술관.
티켓팅을 하고 전시실에 입장하면 봄의 온화한 기운을 담은 그림이 우리를 맞이한다.



전병현, blossom, 2010, 캔버스에 혼합재료
맘을 확 사로잡았던 첫 작품. 연한 꽃이 만발한 느낌이 너무 실감나 가까이서 보니 질감이 매우 도드라졌다. 물감을 두껍게 칠한거보다 더 입체적이어서, 껌이나 목공용 본드를 굳혀 색을 칠한게 아닐까 얕은 수준 안에서 생각해보았다.


전시실 바닥 곳곳에 텍스트.
그림 속에서 풍기는 계절감 너머, 우리가 살면서 옅게 느끼는 계절과 닮아있는 상황이라던지, 너무나 사사로워서 그냥 지나쳐버리지만 절기가 가져다주는 위로감이라던지. 다른 차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대한 이야기.

제목이 좋다.


여름.
복잡한 마음을 달래며
숲을 걷다보니
마음이 넓어진다

너름너름한 그림들 사이에서 발견한 천경자님의 개구리!

푸르고 무성한 여름 나무숲이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에 무겁게 흔들리는 모습을 볼때면 갑자기 멍해지면서 컴퓨터 그래픽을 상영하고 있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그런 감각을 깨우는 작품이었다.
안병석, 바람결-강변에서, 1990

가을이다.

오치균, 감, 2010
붉은 감이 소담하게 영근 오치균님의 작품 앞에선 관람실에 있던 어머님들이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림 앞에 넓직한 평상이 있어 둘 셋 함께 앉아 감나무를 바라볼 수 있다.


겨울.

다시 힘내서
또 걷다.

겨울을 마지막으로 왠지모를 쓸쓸함에 잠겨있는데 벽 하나를 지나니 이대원님의 화사한 그림이!
행복한 화가 이대원.
알록달록 생동감 넘치는 화풍에도 추억과 향수를 건드리는 소재는 어딘가 마음에 아릿함을 남긴다.





2층 강렬한 '美人 미인; 아름다운 사람' 전
여인이 아닌 '미인', 미를 소비하기 위한 여성이 아닌 많은 작가들이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조명하는 전시다.


언뜻언뜻 보이는 고운 여인의 뒷모습. 천을 훠이 거두며 작품을 보는 기분이 독특했다.




'美人 미인; 아름다운 사람' 끝에 故 천경자 화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고독하고 음울한 일상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실제로 보니 작지만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눅눅하고 검게 변한 낙엽, 짓이겨진 은행을 밟으며 쉽게 우울감에 빠지는 요즘. 남은 11월, 12월 계절의 끝자락을 달리 생각하게 만드는 전시였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온 세상 풍경이 연약해지는걸 보며, 나의 마음도 약해지지만- 말없이 사그라드는 모습이 애처롭기 보다 아름답게 느껴진 이유는 자기 역할을 순순히 응하는 모습이 다음에 자랄 초록을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없어져가는 낙엽은 자연의 순환과 그 역할에 순종하며 나 죽기 싫어 하고 꼿꼿이 샛노랗게 겨울을 지새는 게 아니라 다시 푸르게 돋아날 새싹을 위해 말없이 떨어져 주는 것이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물러날때 물러날줄 아는것이 가을과 겨울, 계절이 주는 지혜인 것 같다.
서울미술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다' 2015.10.16 - 2016.8.28
사진, 글 - 예슬, 혜연

